주간동아 1052

2016.08.24

강유정의 영화觀

한국형 재난에서 느끼는 현실적 공포

김성훈 감독의 ‘터널’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noxkang@daum.net

    입력2016-08-19 15:4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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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전자에게 터널은 달갑지 않은 공간이다. 공기 질이 바뀌어 열린 창문을 닫는 수고를 해야 한다. 터널 내 사고는 무척 위험하다는 사전지식이 공포를 준다. 그래도 터널에 들어가면 금세 나오기 마련이어서 이런 불쾌와 불안은 몇 분을 넘지 않는다. 불안도 만성이지만 극복도 만성이라, 하루에도 몇 번씩 불안과 불쾌를 경험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사고란 무엇인가. 그런 오래된 불안이 눈앞의 현실이 될 때, 그건 만성이 아니라 급성이 되며 결국 생사를 건 문제가 되고 만다. 영화 ‘터널’은 관객의 이런 공감대에서 출발한다.

    ‘터널’의 공감대는 터널이라는 공간이 주는 동물로서의 보편적 불안에 한국 사회라는 특수한 경험적 불안이 결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만약 ‘터널’이 문제적 영화로 기억된다면 전자보다 후자 때문일 테다. 사고 원인만 해도 그렇다. 주인공 정수(하정우 분)는 개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널을 지나다 사고를 당한다. 오래된 터널이 아니라 신축 터널이라는 게 첫 번째 공감 포인트다. 부실공사가 있었고, 환풍기 개수가 모자라며, 도면과 실체가 어긋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구조적 부실, 이게 매우 핍진하게 다가온다.

    두 번째 공감은 재난구조의 한국적 특수성에서 느껴진다. 영화에서는 119소방대가 실무를 담당한다. 만약 배경이 미국이었다면 좀 더 전문적인 전담팀이 있었겠지만, 우리는 119에 너무 많은 의무를 주고 권한 부여는 꺼리지 않는가. 한 사람을 살리고자 소방대장은 전전긍긍하는데 막상 결정권을 가진 고위 인사는 “전문가와 상의해 적절하게 대처하라”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명령만 내린다.

    세 번째는 모든 것을 경제논리로 환산하는 우리다. 영화 ‘터널’에는 터널 안 생존자와 터널 밖 우리라는 대립구도가 놓여 있다. 처음엔 우리도 타인의 불행에 몹시 공감하고 생환에 관심을 두지만 시간이 지나면 슬그머니 경제논리가 고개를 내민다. 한 사람을 살리는 데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간다거나 그로 인한 잠재적 경제손실은 얼마가 된다 같은 논리 말이다. 만약 가족이 아파서 생사를 오간다면 병원비가 걱정돼 포기할 수 있을까. 가족이라면 할 수 없을 이런 결정이 ‘남’이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그런 세상의 형편 또한 ‘터널’에서는 중요한 풍경 가운데 하나다. 이 풍경들 위에 ‘끝까지 간다’를 연출한 김성훈 감독의 공간 활용 감각과 배우 하정우만의 여유가 보태진다. 터널이 내려앉은 폐소공간에서 그래도 미치거나 포기하지 않고 견딜 수 있다는 가정은 하정우의 능글능글한 미소와 목소리로 설득 가능한 일이 된다.



    물론 구체적으로 따져 들어가면 개연성이 어긋나는 일이다. 감독은 그런 부분은 일부러 편집해 건너뛰기를 선택한다. 따지고 보면 기적이란 그렇게 개연성을 넘어서는 일을 가리키지 않던가. 만일 국가가, 시스템이, 사람이 한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없다면 나머지는 개연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몫 아닐까. 그런 몫을 통해 모든 부조리와 모순을 넘어 한 사람이 살아나니 말이다.

    그렇다면 결국 재난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시스템이나 행정력이 아니라 기적에 의존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매우 아이러니한 질문이 가능해진다. 우리가 여러 번 경험한 적 있는 질문이 시각적 공감대를 통해 더 절실히 다가온다. 위안을 찾자면, 적어도 영화에서는 극복 불가능한 재난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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