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5

2001.05.24

“현대 망하면 네가 책임질래?”

계열사 금융지원 둘러싸고 ‘부담 떠넘기기’ 백태, ‘물귀신작전’에 ‘뒷다리잡기’까지

  • < 성기영 기자 sky3203@donga.com >

    입력2005-01-28 12: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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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망하면 네가 책임질래?”
    3인 3색의 ‘떠넘기기’ 드라마였다. 투신권의 반발로 끝까지 진통을 거듭한 하이닉스반도체(현대전자)의 채무조정 문제가 결국 투신권이 6800억원대의 하이닉스반도체 회사채 인수에 동의함으로써 마무리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금감위, 채권단, 서울보증보험 3자의 책임 떠넘기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먼저 채권은행의 태도. 채권은행들은 하이닉스반도체의 1조원대 전환사채(CB) 발행 요구에 대해 신용보증기금(이하 신보)의 보증이 좌절되자 투신권을 끌어들이는 ‘물귀신’ 작전을 썼다. 우리만 손해보기에는 뭔가 억울하고 불안하다는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두 번째 투신사들의 태도. 고객들의 항의를 방패막이로 하이닉스반도체의 CB 인수를 거절한 투신사들은 결국 채권은행단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이번에는 서울보증보험을 끌어들여 6000억원에 대한 보증을 요구했다. 뭔가 잘못되었을 경우에 대비한 안전판을 마련해야겠다는 현실적 절박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울보증보험의 태도. 처음에는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막판에 가서야 금감위를 끌어들여, 정부와 맺은 양해각서(MOU) 위반이 아니라는 유권해석을 내려달라며 다시 정부를 물고 늘어졌다. 만약 하이닉스반도체가 잘못되어 그 돈을 물어내야 할 경우 이 사태는 우리가 책임질 수 없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채권은행이 투신권을 끌어들이고, 투신권은 보증보험을, 다시 보증보험은 정부와 금감위를 끌어들이는 ‘책임 떠넘기기’의 악순환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간단하다. 3자 모두 하이닉스반도체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인지 확신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예정에도 없이 졸지에 부실기업에 6000억원대의 보증을 해준 서울보증보험측은 초반부터 난감한 빛이 역력했다. 정부는 서울보증보험에 현재까지 이미 4조6500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하였고, 조만간 공적자금관리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추가 공적자금을 투입할 예정이다. 게다가 1999년과 2000년 두 차례에 걸쳐 정부와 MOU를 맺어 신규 회사채 보증 금지 등을 약속한 바 있다. 양해각서 해석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에서 정부는 ‘양해각서는 신규 보증을 금지한 것이 아니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오히려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한 것은 서울보증보험측이었다. 그러나 서울보증보험측도 보증할 수 없다고 적극적으로 버틴 것은 아니었다. 예금보험공사(이하 예보) 관계자는 “서울보증보험이 정부가 MOU를 수정하기 전까지는 하이닉스반도체의 회사채 인수에 보증을 설 수 없다고 버티는 상황에서도 정작 (MOU 체결 당사자인) 예보에는 유권해석 의뢰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서울보증보험 역시 나중에 정부의 지시 없이 신규 보증을 섰다가 이를 몽땅 뒤집어쓰는 사태를 피하고자 언론을 상대로 ‘정부가 MOU를 수정해야 한다’는 간접 시위를 벌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지난 99년 서울보증보험이 예보에 제출한 경영정상화 계획에는 ‘신규 회사채 보증을 제한하되 기업구조조정 대상 업체 및 일부 우량 기업체에 대한 차환을 선별적으로 운영한다’는 구절이 들어 있다. 2000년 서울보증보험이 공적자금을 받으면서 예보, 금감위 등 3자 간에 맺은 MOU에는 신규 회사채 보증을 금지한다는 명문화한 규정은 없지만 ‘금융성 종목을 축소한다’는 구절이 보인다. 전체 보증에서 금융성 종목이 차지하는 비중을 줄인다는 원칙적 의미의 언급이다. 이를 두고 금감위에서는 MOU를 수정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유권해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보 관계자는 “정부에서는 2000년판 MOU를 맺음으로써 99년에 서울보증보험이 금감원에 제출해 승인받은 경영 정상화 계획은 무효가 된 것으로 파악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해석상의 문제가 어떻든지 간에 결국 공적자금을 받은 채무자는 신규 보증을 꺼리는데 공적자금을 빌려준 채권자가 오히려 나서 채무자를 향해 ‘괜찮으니 총대를 메라’고 종용하는 해프닝이 벌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한푼의 공적자금이라도 지켜야 할 정부가 오히려 공적자금의 방만한 사용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정작 하이닉스반도체측은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는 분위기여서 대조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하이닉스반도체의 재무자문사인 살로먼스미스바니와 채권단이 목표로 하는 1조8000억원 규모의 외자 유치에 모두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이중에서 일부 투자금액을 끌어들이는 데 그칠 경우 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다. 기껏 만들어 놓은 채무조정안도 별 소용없는 퇴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하이닉스반도체 관계자는 “현재의 채무조정안이 상황을 보수적으로 보고 짠 것이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 망하면 네가 책임질래?”
    또 다른 현대 계열사인 현대건설의 자구방안을 마련하면서 정부가 신보의 보증을 끌어다 댄 것 역시 중소기업 보증재원을 끌어다가 특정 대기업에 특혜 보증을 해주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한다. 지난 3월 말 정부와 채권단은 현대건설에 대해 출자전환 방안을 발표하면서 현대건설의 전환사채(CB) 7500억원에 대한 신보의 보증 방안을 밝혔다.

    그러나 신보는 이미 회사채 신속인수제도를 통해서만 현대건설에 9900억원대의 보증을 서주었기 때문에 이번 자구안에 포함된 7500억원의 전환사채 신규보증을 포함하면 현대건설이라는 단일기업에만 1조7472억원의 보증을 서는 것이다. 이는 신보가 갖고 있는 특별보증 재원의 82%에 이르는 금액이다. 이는 무려 1만7742개의 중소기업에 1억원씩 보증을 설 수 있는 금액이다.

    현대건설에 대한 신보의 ‘무차별적’ 지원은 자금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에 대한 신용보증을 주임무로 하는 신보의 창설 취지에도 어긋난다. 또한 신보는 회사채 신속인수제도로 인해 이미 현대 계열사에 대해 3조7000억원대의 보증부담을 안고 있다. 부실기업에 대한 이러한 과다 보증은 결국 신보 자체의 부실화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신보의 한 관계자는 “부실 대기업에 대한 집중적 보증으로 인해 한방에 나가떨어진 대한보증보험이나 한국보증보험의 재판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다.

    한발 더 나아가 신보 노동조합은 정부가 추진하는 현대건설 CB에 대한 보증방안을 본격 추진할 경우 신보의 보증을 받은 26만여 개 중소기업의 연대서명을 받아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벌인다는 계획도 밝혔다. 신보 노동조합 구자군 부위원장은 “재경부 장관이 이사장을 임명하게 되어 있는 상황에서 정부의 지시를 거역할 수 없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고려대 이필상 교수(경영학)는 “현대 계열사들이 출자전환이나 채무조정을 계기로 살아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공적자금을 계속 쏟아붓는 방식은 결국 기업도 잃고 공적자금도 잃어버릴 가능성만 커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특히 “보증보험이나 신용보증기금의 경우 국민의 부담을 바탕으로 하는 공공성을 띠기 때문에 정부 마음대로 보증을 선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하이닉스반도체와 현대건설에 대한 편법 지원보다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은 편법이 또 다른 편법을 낳는 악순환을 낳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현대 계열사들을 둘러싼 이해 관계자들이 서로 책임지지 않으려고 떠넘기기 경쟁을 벌인 것도 편법이 가져올 재앙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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