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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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주검’ 영구보존이냐 매장이냐

우파 정치인들 매장 요구에 공산주의자들 강력 반발… 푸틴 정부 처리 고심

  • 입력2005-03-02 14: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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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닌 ‘주검’ 영구보존이냐 매장이냐
    얼마 전 푸틴 대통령과 의회가 공식승인한 러시아 연방의 국가 상징과 관련, 또다시 레닌의 시신 처리가 핫이슈로 떠올랐다. 우파 정치인들은 구소련의 국가(國歌)를 받아들이는 대신 영구보존 처리한 레닌의 시체를 매장할 것을 제안했다. 러시아 정교회도 레닌 묘의 비기독교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조심스럽게 매장을 옹호하고 있다. 이에 대해 공산주의자들은 강력히 반발하며 오히려 옐친 시대에 폐지하였던 레닌 묘의 의장대를 복원하자고 주장한다. 고향의 어머님 곁에 묻히고 싶다던 레닌 자신의 유언과는 달리, 수십 년간 붉은광장에 안치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던 그 사체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작년 12월 푸틴 대통령은 우파연합과 야블로코당, 지식인층, 러시아 정교회의 반대가 있음에도 대 국민연설을 통해 구소련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소련 국가(國歌)를 러시아의 새로운 국가로 채택하고, 국가문장(紋章)은 쌍두독수리, 국기(國旗)는 제정 러시아를 상징하는 ‘삼색기’로 확정했다. 국가는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갖게 하고 화합을 도모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옐친도 매장 결정했다 실행 못해

    구소련의 국가를 가사만 바꾸어 러시아 연방의 새 국가로 결정하는 데는 물론 많은 반대와 논란이 있었다. 러시아 우파 정치인들은 이것을 공산주의의 부활이라며 크게 반대했다. 그러나 ‘강력한 러시아 건설’이라는 모토 아래에 전반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푸틴 대통령은 국민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이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그 일환으로 구소련 국가를 러시아 연방의 새로운 국가로 결정했다. 물론 이것은 현재 러시아인의 정서와도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3%가 “소련 붕괴가 유감”이라며 역사 속으로 사라진 소련에 아쉬움을 표했다. 10년간의 시장개혁과 민주화 노력에도 초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이 추락하고, 사회혼란과 생활수준이 낮아진 데 대한 불만이 과거에 대한 막연한 향수로 이어지는 것이다.

    추바이스와 보리스 넴초프 등 우파 정치인들은, 여론을 등에 업은 푸틴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구소련의 국가를 일단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 보상으로 현재 붉은광장에 있는 레닌 묘를 “혁명과 정치 탄압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위한 기념비”로 바꿀 것과, 레닌의 시체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볼코보 묘지에 묻을 것을 제안했다. 물론 크렘린측은 새로운 국가의 상징문제와 레닌 시신의 매장문제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발표했지만, 이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이러한 정치적 거래에 많은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레닌의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닌은 1902년부터 사용한 필명이다.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중심인물이며, 한 세기 동안 전 세계를 양분했던 공산주의 최고의 사상가이다. 24년 레닌이 죽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그의 시신을 미라로 보존할 것을 결정하고, 건축가 슈세프에게 시신을 안장할 묘를 만들게 했다. 현재의 묘는 30년에 지은 것이다. 붉은 대리석으로 치장한 거대한 묘는 면적이 외부 5800m2, 내부 2400m2이다. 입구에는 검은 색 돌로 레닌의 이름(ЛЕНИН)이 크게 새겨져 있다. 70년대에 한 차례 수리를 거쳤는데, 그때 묘 관리를 위한 제반 자동시스템을 갖추고, 1만2000개의 대리석 블록도 새로 교체했다. 지금도 레닌 묘는 모스크바의 명소로 많은 참배인과 관광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으며, 붉은광장과 함께 유네스코에서 세계 문화유산의 하나로 지정하였다.

    레닌 ‘주검’ 영구보존이냐 매장이냐
    그러나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은 93년 레닌 묘의 의장대를 폐지하고, 99년 7월에는 그동안 미라로 보존해 온 레닌의 시신을 땅에 묻기로 결정했다. 공산주의의 아버지인 레닌을 러시아의 심장부에서 밀어냄으로써 공산당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공산당을 불법화하는 법령을 제정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옐친은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해 그러한 결정을 곧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현 푸틴 대통령에게 미루었다.

    옐친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 정치노선을 걷고자 하는 푸틴 대통령이 과연 순순히 레닌 묘를 폐지할지는 의문이다. 최근 ‘콤소몰스카야 프라브다’ 지와의 인터뷰에서 옐친 전 대통령은, 레닌 시신의 매장문제와 공산당 불법화 문제를 매듭짓지 못하고, 푸틴 대통령에게 위임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레닌 묘의 관리보존을 위해 연간 150만 달러의 비용을 쓴다고 한다. 현재 레닌 묘의 공식적인 정부지원은 크게 줄어든 상태이고, ‘레닌 재단’(Le nin Foundation)이라는 민간단체가 기금을 조성해 묘를 유지하고 있으며, 시신보존을 위한 연구활동도 지원한다. 또한 이 재단은 서명운동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신 매장 반대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들은 강력한 구소련의 상징인 ‘위대한 지도자 레닌’의 시신에 손을 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격분한다.

    극단적인 레닌 찬양주의자들말고도 대다수 러시아인들에게 레닌은 아직까지도 깊은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 여론조사기관인 ‘퍼블릭 오피니언 파운데이션’이 1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14%가 레닌을 20세기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았다. 이같은 결과는 레닌에 대한 노년층의 변함없는 존경심을 반영한 것으로 평가된다.

    알렉시 2세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는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을 유리관에 전시하는 것은 비인간적이고, 기독교 정신에도 어긋난다”며 레닌의 장례식은 기독교식으로 치러져야 한다고 말했다. 많은 러시아 사람들도 레닌의 시신이 언젠가는 그의 유언대로 어머니의 곁에 묻혀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급변하는 정치상황에서 그렇게 중대한 문제를 서둘러 결정해서는 안 되며, 먼저 사회적 분위기가 성숙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단합당’의 당수 보리스 그리즐로프의 말처럼 이 문제는 레닌이 죽은 지 100년이 되는 2024년에나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레닌 시신의 안장문제는 단순히 정치논리로만 풀 수 있는 게 아니다. 70년 이상 러시아를 지배해 온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단지 레닌을 매장해 버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러시아의 정치는 물론 정신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즉 레닌 묘를 폐지한다고 해서 10월혁명, 레닌, 스탈린, 소련의 존재가 역사에서 지워질 수는 없다. 그것은 곧 러시아인 스스로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죽은 레닌을 부활시키려는 사람들도 레닌에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자신들의 정치노선에 유리한 입지를 마련하기 위한 전략으로 활용할 뿐이다. 러시아 정치 지도자들이 죽은 레닌을 놓고 수개월씩 소모적인 논쟁을 계속하는 동안 러시아 국민들은 산더미 같은 국가 부채와 체첸 분쟁 등으로 더욱더 어려워진 삶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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