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0

2000.11.23

눈썹 움직임도 안무 신화로 남은 무용 혼

  • 입력2005-05-30 14: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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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 역사에서 안무가 보브 포시를 빼놓고는 이야기가 되질 않는다. 포시는 1950∼60년대엔 미국 최고의 뮤지컬 안무가로, 1970년대엔 최고의 흥행사로 군림하며 가장 미국적인 뮤지컬의 형태를 완성시킨 인물이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뮤지컬 ‘피핀’(73년 토니상 수상) ‘카바레’(아카데미 감독상 수상)가 그의 작품이며, 자전적 영화 ‘올 댓 재즈’(79년)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그는 1927년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보드빌 배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매일 밤 극장에서 스트리퍼들의 몸짓을 보며 자란 덕분에, 그의 안무는 나이트 클럽 쇼를 연상시키는 매우 관능적인 동작이 중심을 이루게 됐다.

    나이트클럽 사회자, 코러스보이 등을 전전하던 포시는 1950년 ‘댄스 미 어 송’으로 브로드웨이에 진출했고, 당시 브로드웨이를 주름잡던 감독 조지 애보트를 만난다. 애보트 감독은 스물 일곱의 포시에게 ‘파자마 게임’(54년)의 안무를 맡겨 큰 성공을 거뒀고, 이어 ‘스팀 히트’로 뉴욕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동안 무조건 화려하고 빠른 템포만 강조하던 뮤지컬 안무가 아니라 포시는 천천히, 하지만 정확하게, 그리고 관능적인 동작을 중시했다. 때로는 눈썹을 움직이는 것까지도 그의 안무에 포함됐다. “관객을 유혹하지 말고 그들이 너에게 다가오도록 만들라”는 포시의 요구는 댄서들에게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 잠시 슬럼프에 빠지기도 하지만 곧 뮤지컬 ‘피핀’과 영화 ‘카바레’로 재기에 성공한다. 안무가와 감독 역할을 병행하면서 75년 ‘시카고’, 78년 ‘댄싱’ 등을 만들어 5000회 이상 공연되는 기록을 세웠다. 79년 그가 감독한 자전적 영화 ‘올 댓 재즈’는 오스카상 9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전세계에 포시의 뮤지컬을 퍼뜨렸다.

    하지만 절정의 불꽃은 곧 사위어 버렸다. 그의 마지막 영화 ‘스타80’(83년)이 혹독한 비판 속에 대실패로 끝났고 이어 17년간 준비했던 뮤지컬 ‘빅딜’ 역시 실패해 그는 재기불능 상태에 빠진다. 얼마 후 심장발작으로 1987년 예순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하지만 죽어서 포시는 멋지게 재기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3년이 지났지만 포시의 이름은 잊히기는커녕 새롭게 재조명되며 끝없이 포시의 이름을 환기시킨다. 99년 1월 포시의 리듬과 색깔, 무용의 혼을 집대성한 뮤지컬 ‘포시’가 공연된 이래 현재도 갈채 속에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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