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8

2000.11.09

근대사의 한 획 … 그녀의 극적인 삶

  • 입력2005-05-26 11:2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근대사의 한 획 … 그녀의 극적인 삶
    사람들은 항상 극적인 인생을 꿈꾼다. 그러나 극적인 인생이란 얼마나 엄청난 용기와 과감한 결단을 필요로 하던가. 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인생을 살았던 여성을 꼽자면 나혜석(1896∼1948)이 단연 으뜸일 것이다. 연극이라는 예술의 속성이 바로 극적인 인생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기에 나혜석은 그 자체로 연극의 매력적인 소재다.

    유진월 작, 채윤일 연출의 ‘불꽃의 여자, 나혜석’(12월31일까지 산울림 소극장)은 사후 반세기가 훌쩍 지난 시점에서 나혜석을 다시 무대 위에 생생하게 부활시킨다. 진명여학교 수석 졸업, 최초의 여성 동경유학생, 한국 최초의 여성 화가, 경성 최초의 서양화 개인전, 최초의 부부동반 유럽 여행 등이 나혜석의 가장 화려했던 시절을 장식하는 이력들이다. 그녀는 화가이자 전문적인 문필가였으며 전투적인 여성운동가이기도 했다.

    나혜석을 연극화하는 데 있어서 그녀의 다각적인 면모는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어느 한쪽에 치중하다 보면 다른 한쪽은 약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화가로서의 나혜석보다는 진보적 여성운동가로서의 나혜석에 비중을 더 실었다. 첫 장면부터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신음하는 조선 여성들의 사례를 나열하며 나혜석이 열변을 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혜석을 다루기에 가장 어려운 지점은 최린과의 연애 사건이다. 그녀는 외교관인 남편을 따라 유럽 여행을 하던 중 파리에서 최린이라는 정치가와 잠시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다. 귀국 후 진심으로 참회하며 남편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3남1녀와 생이별을 하며 결국 이혼당하고 만다. 재산 분배 요구마저 받아들여지지 않아 곤궁한 삶을 살아가게 되고, 부정을 저지른 여자라는 이유로 온갖 냉대와 멸시를 받는다. 파리로 가기 위해 최린에게 경제적 원조를 부탁하지만 그마저 거절당하자, 최린을 상대로 정조 유린에 관한 위자료 청구 소송을 제기해 다시 물의를 일으킨다. 그녀는 재기를 꿈꾸었으나 실패하고 행려병자 신세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최린과의 열애는 불같은 예술가적 정열의 소산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남자들의 외도가 정당화되던 사회 풍조 속에서 그녀의 뉘우침이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전혀 수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연극 속에서는 예술가로서의 나혜석보다 급진적 페미니스트로서의 나혜석이 전면에 부각되고 있어 그녀의 입장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미흡한 감이 있다. 그녀를 억압하는 주변적 상황이 보다 절실하게 그려지고 파리라는 자유로운 공간에서 갑자기 해방감을 만끽하는 심리적 동기가 설득력 있게 강화되어야 한다.



    연출자는 소극장 무대에서 제한된 수의 배우들로 표현하기 위해 일인다역과 코러스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나혜석의 오빠역을 비롯하여 여러 인물로 변신하는 전수환의 순발력 있는 연기력이 주목된다. 모스크바에서 유학하고 나혜석역을 거머쥔 박호영은 너무 당찬 분위기로 일관해 나혜석의 섬세한 예술혼과 여성성 및 모성을 포괄적으로 보여주지는 못했다.

    이 연극은 나혜석의 시대로부터 오늘날 여성 대 남성의 관계가 얼마나 변화되었는지에 대해 충격적인 질문을 던진다. 계속되는 여성들의 질곡은 곧 남성들과 그 자식들에게도 불행으로 이어진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