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월 20일(이하 현지 시간) 연방대법원 판결이 나오자마자 무역법 제122조에 따라 전 세계를 대상으로 글로벌 관세 10%를 부과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뉴시스
이런 대법관들의 정치 성향으로 볼 때 현 연방대법원은 보수 절대 우위(6 대 3) 구조다. 이 때문에 미국 언론들은 연방대법원을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평가해왔다. 실제로 연방대법원은 2022년 6월 낙태권을 인정한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49년 만에 폐기했다. 당시 연방대법원은 헌법에는 낙태를 보장하는 규정이 없다고 판결했다. 2024년 7월에는 전직 대통령 재임 중 공적 행위에 대해 광범위한 형사상 면책특권을 인정하는 결정을 내려 트럼프 대통령에게 재출마 기회를 제공했다. 연방대법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한 지난해 1월 20일 이후에도 트럼프 대통령의 어젠다에 힘을 싣는 판결들을 내려왔다.
美 대법 “트럼프가 IEEPA 자의적 해석”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9명. 6 대 3 보수 우위 구도로 정치 성향이 나뉜 것으로 평가되나, 이번 판결에서는 3명의 보수 성향 대법관이 다수 의견(상호관세 위법)에 합류했다. 미국 연방대법원 홈페이지
로버츠 대법원장은 다수 의견서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이 IEEPA를 자의적으로 해석해 관세 결정 권한을 가진 연방의회를 거치지 않고 위법하게 상호관세를 부과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4월 2일 미국의 만성적인 대규모 무역적자와 국경을 통한 불법 마약 유입(특히 펜타닐)을 ‘국가안보 위협’이라고 주장하며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IEEPA에 근거해 교역국들에 고율 상호관세를 부과했다.
IEEPA는 대통령이 국가안보, 외교 정책, 또는 경제에 대한 ‘특이하고 비상한 위협’이 외국에서 발생했다고 판단할 경우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외국과의 무역 및 금융 거래를 포함한 경제 활동을 통제할 수 있도록 규정해놓은 연방법이다. 대통령은 이 법에 따라 외환 거래 차단, 외국 자산 동결, 수입 제한 및 규제 등 다양한 경제적 제재 조치를 취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집권 이후 각국의 비판과 국내 물가상승 등 부작용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IEEPA에 근거해 상호관세를 밀어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가 무역적자를 개선하고 대미 투자를 촉진함으로써 미국 제조업이 부흥하고 일자리가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수입 규제 권한 있어도 관세 부과할 수 없어”
그런데 IEEPA에는 대통령이 국가 비상사태에 따라 수입을 ‘규제’할 권한은 명시돼 있지만 ‘관세’나 ‘세금’을 임의로 부과할 수 있다는 문구는 없다. 관세 부과 권한은 의회에 있다. 행정부가 긴급 권한을 근거로 의회의 명시적 승인도 없이 자체 판단만으로 관세를 부과하는 것은 헌법상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번 판결의 핵심 내용이다.이번 판결엔 이른바 ‘중대 문제 원칙(major questions doctrine)’이 적용됐다고 볼 수 있다. 이 원칙은 의회가 명시적으로 권한을 위임한 경우가 아니라면 행정부가 법규를 유연하게 해석해 국가에 경제·정치적으로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단독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법리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대통령이 금액·기간·범위에 제한이 없는, 전례 없는 관세 부과 권한을 일방적으로 행사해왔다”며 “이런 권한을 행사하려면 의회의 명확한 승인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수입 규제 권한에는 관세도 포함된다고 주장해왔다.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관세 부과를 위해 IEEPA를 발동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처음이다. 이로써 트럼프 대통령이 전 세계 무역 상대국에 부과한 10% 기본관세에 추가로 국가별로 차등 부과한 상호관세는 법적 효력을 상실했다.
상호관세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표적인 관세정책으로 이번 판결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2기 2년 차에 상당한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됐다. 특히 이번 판결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자신의 정치적 명운이 걸린 11월 3일 중간선거를 앞두고 국민의 신뢰를 잃는 등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미국 국민 상당수는 그동안 일방적이고 일관성마저 결여된 관세정책을 불신해왔다. 게다가 이번 판결로 트럼프 대통령 입지도 국제정치 무대에서 좁아질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관세를 지렛대 삼아 상대국들을 경제는 물론, 외교·안보·군사 등 분야에서 압박해왔는데 이런 수단을 사용하기 어렵게 됐다.
이번 판결로 미국 정부는 막대한 재정적 타격도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규모 감세에 따른 재정적자를 상호관세 수익으로 메우려 했으나, 이번 판결로 그동안 거둬들인 천문학적 관세를 수입업체들에 고스란히 환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 세관국경보호국(CBP)이 지난해 거둬들인 관세 2500억 달러(약 361조4700억 원) 중 절반이 상호관세로 추정된다. 로이터에 따르면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의 예산모델 연구그룹(PWBW)은 미국 정부가 환급해야 할 관세가 1750억 달러(약 253조 원)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미국 등 각국 기업의 관세 반환 소송도 줄을 이을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한국 등 상당수 국가가 상호관세 부과를 피하려고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를 약속하며 미국과 새롭게 무역 합의를 했다. 앞으로 합의 실효성을 두고 각국이 전면적인 재협상 요구를 하는 등 상당한 혼란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무역법·무역확장법 등 총동원

미국 연방대법원은 2월 20일 트럼프 대통령의 국제경제비상권한법(IEEPA)에 입각한 상호관세 부과가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뉴시스
트럼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 계정에 올린 글에서 “주요 교역국들이 수십 년 동안 미국을 착취해왔음에도 아무런 제재 없이 방치돼왔다”며 “향후 몇 달 안에 법적으로 허용되는 새로운 관세를 확정해 발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거론한 새로운 관세 부과 수단은 무역확장법 제232조, 무역법 제122조·201조·301조, 관세법 제338조 등이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정부가 무역법 제301조에 근거한 관세 조사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이른바 ‘슈퍼 제301조’로 불리는 무역법 제301조는 미국에 불공정하고 차별적 무역 관행을 취하는 무역 상대국에 일정 기간의 통지 및 의견 수렴 등을 거쳐 관세 같은 광범위한 보복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정부에 부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교역 상대국 대부분이 무역법 제301조 조사 대상이 된다”고 강조했다. 무역확장법 제232조는 특정 품목의 수입이 미국 국가안보를 위협한다고 판단될 경우 관세 등 적절한 조치를 통해 수입을 제한할 권한을 정부에 부여한다는 조항이다.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은 “이런 대체 관세들을 동원하면 올해 미국 정부가 거둬들이는 관세 수입은 기존과 거의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경제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대체 수단으로 내세운 무역법 제301조 등은 적용 기한이 짧고 조사 절차가 복잡해 전면적이고 즉각적인 관세 부과 효과를 거두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초대형 악재를 뒤집어쓴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더욱 강력하고 새로운 ‘관세 폭탄’ 카드를 꺼내 들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의 새로운 관세 폭탄이 어떤 형태와 규모로 떨어질지 모르는 각국은 또다시 불확실성에 직면하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