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간동아 로고

  • Magazine dongA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누군가 펑크를 묻거든 크라잉넛을 보게 하라 [음담악담]

베스트 앨범으로 데뷔 25주년 자축하는 크라잉넛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누군가 펑크를 묻거든 크라잉넛을 보게 하라 [음담악담]

크라잉넛 밤이깊었네. [드럭레코드]

크라잉넛 밤이깊었네. [드럭레코드]

크라잉넛이 데뷔 25주년을 맞았다. 멤버 교체 한 번 없이 이만한 세월을, 그것도 휴식 없이 활동한 밴드는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힌다. 뜻깊은 해를 맞아 그들은 첫 베스트 앨범을 작업 중이다. ‘말 달리자’와 함께 그룹을 대표하는 노래인 ‘밤이 깊었네’를 재녹음해 선공개했다. 베스트 앨범에 들어갈 다른 곡들도 지금 소리로 다시 녹음할 예정이다. 이 노래를 듣고 있노라니 여러 감정이 밀려온다. 이 노래가 발표된 게 2001년. 19년이 흘렀지만 ‘원숙’이라는 단어는 크라잉넛에게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듣는 사람은 시간 격차를 스스로 느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특히 그때 홍대 앞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더욱더.

1996년 ‘드럭’에서 첫 만남

크라잉넛, 노브레인 합동앨범 96. [드럭레코드]

크라잉넛, 노브레인 합동앨범 96. [드럭레코드]

나도 그중 하나였다. 1996년 말 군복무 중 휴가를 나와 홍대 앞 클럽 ‘드럭’을 찾아갔다. 그 무렵 신문 문화면에서 인디 밴드들이 드럭에서 공연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사진만으로도 충격이었다. 입대 전 외국 음악 잡지에서나 보던 패션과 헤어스타일이 거기 있었다. 실물을 확인하려고 사복으로 갈아입자마자 찾아갔다. 그라피티가 빼곡한 계단에 펑크족이 가득했다. 충격과 두려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맨몸으로 사파리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노브레인과 크라잉넛의 공연을 봤다. ‘말 달리자’를 처음 들었다. 또 다른 형태의 충격이었다. ‘한국에 이런 노래가 있다고? 와, 끝내주네.’ 1년 후 전역했고, 그날부터 나는 드럭 ‘죽돌이’가 됐다. 펑크족이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펑크가 된다는 것은 메탈이나 그런지를 추구하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우선 머리부터 그랬다. 헤비메탈 스타일? 무조건 길러서 파마를 하면 얼추 성립한다. 그런지? 단발 정도로 기른 후 일주일 이상 감지 않으면 된다. 

그렇지만 펑크의 상징은 중력을 거스르는 스파이크 헤어, 즉 공격적으로 뾰족뾰족 세운 머리 스타일이다. 왁스와 포마드가 국내에 도입되기 전이라 머리를 세우는 과정은 지난했다. 헤어 젤로 가닥가닥 머리를 세운 후 스프레이를 뿌리거나, 물에 불린 비누를 찍어 발라 세웠다. 전자는 머리가 길면 길수록 시간이 오래 걸렸고, 후자는 소나기라도 내리면 처참한 몰골이 됐다. 전자에겐 외출을 위해 한 시간 반이 필요했으며, 후자에겐 바지 주머니 속에 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비닐봉지가 필요했다(우산을 갖고 다니는 건 ‘가오’가 상하는 일이었으니까). 

머리보다 더 힘든 건 패션을 갖추는 일이었다. 일본으로부터 펑크 패션을 수입해 파는 가게가 있었지만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인터넷 쇼핑도 없던 시절, 방법은 하나였다. DIY(Do It Yourself). 몸매가 받쳐주는 친구들은 서울 동대문에서 ‘레자(인조가죽)’ 잠바를 사 청계천에서 구입한 ‘찡’을 일일이 박았다. 짧으면 일주일, 길면 한 달이 걸리는 고된 노동이었다. 어디서 알아냈는지 몰라도 부산 보세공장에 가면 일본 수출용 반디지 바지(죄수복에서 모티프를 얻어 양 바짓가랑이를 끈으로 연결한 체크무늬 바지)를 살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떼 지어 부산으로 내려가 피복공장을 뒤졌다.



험난했던 펑크족의 추억

크라잉넛 뮤비. [유튜브 캡쳐]

크라잉넛 뮤비. [유튜브 캡쳐]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나에겐 그런 노동을 할 부지런함도, 부산까지 내려가 (살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옷을 살 열정도 없었다. 게다가 복학생이 될 처지에 사회적 지위도 고려해야 했다. 결심했다. 옷은 대충 입고 머리만 제대로 하자. 그리고 포인트만 주자. 바로 허리에 늘어뜨리는 체인이었다. 펑크가 아니더라도 당시 홍대 앞을 근거로 삼은 청춘이라면 누구나 체인을 두르고 다녔다. 그 나름 불량의 상징이었다. 철물점에서 파는 굵은 쇠사슬을 두르면 진짜 펑크였고, 대부분은 사슬 목걸이 비슷한 걸 착용했다. 이화여대 앞만 가도 쉽게 살 수 있는 액세서리였다. 

사소한 걸로 포인트를 주긴 싫었다. 조금은 튀고 싶었던 것이다. 집에 아무도 없던 날, 안방 옷걸이에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의 장식 벨트였다. 그것도 스테인리스가 아니라 은으로 보이는 재질이었다. 그 빛에 현혹된 걸까. 잽싸게 엄마의 벨트를 허리에 길게 늘어뜨리고 집을 나섰다. 불량의 늪에, 펑크의 세계에 입문한 기분이었다. 

의기양양하게 드럭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감탄했다. 어떻게 그런 긴 체인을 매달고 다니느냐며. 그도 그럴 것이, 보통 체인은 허리에서 시작해 무릎 조금 위에서 끝나야 멋있다. 그게 표준이다. 그러나 벨트를 체인처럼 둘렀기에 무릎에서 꽤 아래쪽으로 늘어졌다. 단검 중심의 제식을 채택한 군대에서 홀로 긴 창을 들고 나타난 돈키호테였다고나 할까. 그들 옆에 서보고서야 깨달았다. 멋있기보다 우스웠다. 하지만 꿋꿋해지기로 했다. 당당히 체인, 아니 벨트를 두르고 다녔다. 

며칠 후 버스를 탔다. 버스에 올라타는 2개의 계단, 왼발을 디뎌 첫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오른발을 디뎠다. 체인이 매달려 있는 바로 그 발이었다. 긴 체인이 무릎에 걸렸다. 출발한 버스 안에서 마치 닭싸움을 하듯 한쪽 발로 깡충깡충 뛰었다. 결과는 자명했다. 꽈당! 체인마저 끊어져 별빛처럼 흩어졌다. 펑크로 가는 길은 너무나 험난했다.

크라잉넛이 로큰롤 밴드라고?

크라잉넛 공연. [위키피디아]

크라잉넛 공연. [위키피디아]

그 후로도 10년 가까이를 펑크족과 어울려 살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펑크인 적이 없던 것 같다. 주변인이었고 관찰자였다. 가끔 그때 사진을 보면 더욱 그렇다. 과장되게 흉내 내고 있을 뿐이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뭔가를 바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마냥 즐거워하면서도 정말 치열했다. 

지금의 크라잉넛은 음악적으로도, 스타일적으로도 펑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들이 펑크가 아니라고 한다면 인정하지 못하겠다. 무엇을 어떻게 하건 그들은 펑크다. 비록 스스로를 로큰롤 밴드라 칭해도 말이다. 

1990년대 크라잉넛을 지금과 비교한다면 박윤식의 목소리는 살포시 두꺼워졌다. 다른 멤버들의 연주는 당연히 일취월장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게 있다. 무대에서 모습이다. 산소가 부족하다고 느껴지던 드럭에서나, 수만 명을 앞에 둔 무대에서나 그들은 관객을 장악한다. 소리에도, 동작에도 빈틈이 없다. 1998년 ‘말 달리자’ 뮤직비디오의 모습이 그대로 겹쳐진다. 

펑크가 무엇인지 설명하려면 꽤 많은 문장이 필요하지만 그들이 있는 한 나는 딱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다. 크라잉넛을 보면 된다고.





주간동아 1238호 (p62~64)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다른호 더보기 목록 닫기
1246

제 1246호

2020.07.03

‘임대차 3법’ 시행 시나리오, “손해 감수하던 집주인도 인내심 무너져”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