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20

2016.01.06

농부 김광화의 밥꽃, 목숨꽃 사랑 22

세상을 빛나게 한 위대한 생명력

야생의 힘, 도라지꽃

  • 김광화 농부작가 flowingsky@hanmail.net

    입력2016-01-05 18: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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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라지꽃을 보면 강하게 끌린다. 나만 그런가. 우리 민족이라면 다 비슷하리라. 그 이유가 도라지꽃이 예뻐서만은 아닐 것이다. 도라지는 우리 민족과 함께 오래도록 살아왔다. 우리 부모, 부모의 부모, 조상 대대로 우리 몸에는 도라지 피가 흘러서가 아닐까.



    심심산천 도라지

    다들 알다시피 우리 민요에 ‘도라지타령’이 있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눈으로 가사를 따라가면 속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멜로디가 흐른다. 민요란 백성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삶 속에서 불러오던 노래. 자연스레 노래와 한 몸이 되니 절로 흥이 솟고, 어깨가 들썩인다. 그 순간 자기 흥에 겨워 마음 가는 대로 가사를 붙여도 되는 노래가 민요다.
    도라지는 그 원산지가 중국 동북부에서 일본 일대까지 흩어져 있다. 그 한가운데가 바로 우리나라. 도라지는 우리나라 야산에서 풀과 함께 자란다. 햇볕이 잘 드는 산언저리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자라다 여름이면 예쁜 꽃을 피운다.
    그런데 도라지를 실제로 키워보면 생각보다 어렵다. 씨를 뿌려, 도라지 싹이 돋아나면 김매는 일이 보통이 아니다. 바늘보다 여린 이파리 사이에서 자라는 풀을 일일이 매주어야 한다. 야생처럼 저절로 쑥쑥 자라주면 좋을 텐데 어림도 없다. 그냥 내버려두면 풀에 치여 나중에는 거의 다 녹아버린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가 뭘까. 도라지에 대해 공부하고 나서야 조금이나마 감을 잡게 됐다. 야생에서 피는 도라지꽃을 본 적 있는가. 나는 우리가 사는 산골을 20년 가까이 쏘다녔지만 딱 두 군데서 두 포기 본 게 전부다. 물론 전국 곳곳을 뒤진다면 군락을 이루며 자생하는 곳도 있긴 하겠지만 아주 드물다.
    그 대신 도라지는 한번 살아남으면 오래도록 산다. 겨울이면 잎과 줄기를 말리고 겨울잠을 잔다. 봄이 되면 새싹을 밀어 올리고 자라다 6월에서 8월에 걸쳐 꽃을 피운다. 빛깔은 보라색이 많으며, 흰 꽃은 드물다. 도라지는 철저히 딴꽃가루받이를 한다. 꽃봉오리가 종 모양으로 벌어지면 그 한가운데 암술대를 꽃밥이 감싸고 있다.   5개 꽃밥이 잘 익으면 꽃밥마다 하얀 꽃가루를 낸다. 제 할 일을 마친 수술은 서서히 말라간다. 그제야 암술은 제 머리를 다섯 갈래로 활짝 펼쳐, 다른 꽃의 꽃가루를 받고자 한다. 이렇게 철저히 딴꽃가루받이를 하는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야생에서 잘 살아남기 위해서다.



    수많은 인연이 엮이어

    수정이 되고 나면 꼬투리마다 씨앗이 영근다. 도라지 씨는 아주 작다. 참깨 씨보다도 작아 점에 가깝다. 꼬투리 하나에만 이런 씨앗이 수십 알. 도라지 한 포기가 한 해에 남기는 씨앗은 수백 알. 여러 해를 살아 도라지 한 그루가 수천, 수만 알을 남기겠지만 야생에서 싹이 터, 풀과 경쟁해 살아남는 녀석은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
    이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야생에서 자라는 도라지란 얼마나 위대한 생명인가. 많고 많은 인연과 환경이 따라줘야 하고, 씨앗 스스로도 싹이 트고자 하는 지극정성이 함께해야 가능한 삶이라 하겠다. 마치 우리 사람이 엄청난 정자들의 경쟁을 뚫고 아기가 되어 이 땅에 태어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도라지는 뿌리가 뻗어가는 모양새도 환경에 따라 많이 다르다. 재배 도라지는 되도록 잔뿌리가 덜 나온 것이 시장에서 인기가 좋다. 반면 야생 도라지는 잔뿌리가 자연스레 발달한다. 주어진 환경에 자신을 최적화한다. 그래서 뿌리 모양도 아주 제각각이다.
    ‘도라지타령’을 그냥 따라 부를 때는 못 느끼던 감흥을 이제 나는 새롭게 느낀다. 앞 구절에서 이어지는 가사는 ‘한두 뿌리만 캐어도 대바구니에 스리살살 다 넘누나’이다. 노래는 부르는 사람에 따라 많은 은유가 가능하다. 처녀가 심심산천에서 캐던 도라지는 그 한 뿌리를 캐면서 만지기만 해도 묘하게 설레고 짜릿했을 테다. 기침이 낫고자 정성스레 캐던 도라지는 아주 가는 뿌리 한 가닥 한 가닥까지 담겨 대바구니로 철철 넘쳤을 테다. 이게 어떤 도라지인가. 이게 어떤 인연인가!




    나는 우리 둘레에 저절로 자라는 도라지를 캐지 않고 보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는다. 어렵사리 살아남은 귀한 생명들. ‘도라지타령’을 나대로 바꿔본다. ‘한두 송이 꽃만 보아도 내 가슴이 사리살살 다 녹는다.’ 함께 건강하고 싶다. 나는 도라지꽃한테 이런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스스로 빛나, 세상을 빛나게 하는 꽃이라고.



    도라지 : 국화아강 초롱꽃과 여러해살이풀. 중국 동북부, 우리나라, 일본이 원산지다. 뿌리를 약 또는 나물로 먹으며 맛은 약간 쓰다. 한방에서는 길경(桔梗)이라 하며 가래, 기침에 약효가 있다고 한다. 도라지 줄기는 하나 또는 여러 개가 모여 나며, 50~90cm 높이로 자란다. 꽃은 충매화로 6월에서 8월에 걸쳐 보라색 또는 흰색으로 핀다. 꽃잎은 종 모양 통꽃. 수술 5개와 암술 1개가 있고 암술머리는 5개로 갈라진다. 씨방은 5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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