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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낮은 행보 큰 울림 교황의 첫 방미

유엔총회 특별연설 등 최고 수준 의전…형제애 강조하며 “나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낮은 행보 큰 울림 교황의 첫 방미

9월 22일부터 27일까지 진행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역사적인 첫 미국 방문은 ‘이보다 더 화려할 수 없다’로 정리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해외 귀빈을 위해 처음으로 공항 영접을 나갔고, 최고 의전의 백악관 환영 행사를 베풀었다. 미 의회에서 상·하원 합동연설이 있었으며, 193개 유엔 회원국의 대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엔총회장에서 ‘특별연설’도 했다. 미국 외교소식통들은 “앞으로 어떤 교황도, 어떤 외국 정상도 이런 수준의 의전을 받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게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최고 일정이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미국인의 가슴에 새겨진 잔영은 화려한 의전보다 빈민, 이민자, 수감자, 테러 희생자, 성폭력 피해자 등 아프고 힘든 사람들에게 그가 남긴 말이었다. 한 뉴욕 시민은 “교황께서 그렇듯 ‘낮은 사람들’에게도 ‘나를 위해 기도해주세요’라고 말씀하실 때 가장 크게 감명받았다”고 말했다. 낮은 행보 뒤에 남은 큰 울림이었다.

“예수님도 세속적 기준으로는 ‘실패자’였다”

9월 22일 오후 3시 50분쯤 알리탈리아항공 전세기편으로 미국 메릴랜드 주 앤드루스 공군기지에 내린 교황은 미셸 여사와 두 딸, 장모까지 데리고 나온 오바마 대통령의 극진한 영접을 받았다. 24일 의회 방문을 마친 직후 교황이 찾은 곳은 워싱턴 성패트릭 성당의 노숙자 쉼터. 교황은 400여 명이 모인 이 자리에서 “하느님 아들(예수님)도 이 세상에 올 때 집 없는 사람이었다. 예수님도 지붕 없는 말구유에서 삶을 시작하셨다”고 말했다. “세상에는 (여러분이 집이 없는 것처럼) 부당한 상황이 많지만 우리는 하느님이 늘 우리와 함께 고통스러워하시고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걸 안다”는 메시지였다.

“다 함께 기도하는 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기도 안에서는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따로 없습니다. 형제애만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도 저를 위해 기도하는 걸 잊지 말아주세요.”



교황의 뉴욕 방문은 미국 최대 도시, 세계 금융과 자본주의의 상징인 ‘뉴욕스럽게’ 화려했다. 교황은 9월 24일 오후 5시쯤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한 뒤 곧바로 헬기를 타고 맨해튼 남쪽 월스트리트 헬기장에 내렸다. 여기서부터 50번 스트리트와 51번 스트리트 사이에 있는 성패트릭 대성당까지 5번 애버뉴 길을 따라 카퍼레이드가 이뤄졌다. 5번 애버뉴는 백화점과 명품 가게가 즐비하고 각종 기념일 때마다 성대한 퍼레이드가 열리는, 맨해튼에서 가장 화려한 쇼핑 거리다.

오후 7시쯤 저녁 미사를 알리는 성패트릭 대성당의 종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교황은 성당 주위를 가득 메운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가끔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려 보이며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성당 안에서는 이중삼중의 신변 확인 절차와 보안검색을 끝내고 미리 입장해 있던 2500명의 성직자와 신도가 교황을 맞았다. 교황은 제단으로 향하는 중앙통로를 걸어가다 멈춰 서서 휠체어에 탄 여학생, 아기를 안은 여성 등과 인사를 나눴다. 교황은 이날 강론 말씀을 통해 가톨릭 성직자들에게 “세속적 성공에 대한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경고했다.

“우리(성직자들)는 교회의 활동을 평가할 때 마치 (회사) 경영을 하듯 얼마나 효율적이었는지, (교회) 운영은 얼마나 잘했는지, 외형적 성공을 이뤘는지를 따지려고 합니다. 그런 물질적 기준이 우리가 섬겨야 하는 ‘가난한 자’들을 더욱 소외시킬 수 있습니다.”

교회 등 종교단체들이 신도 수 늘리기나 교회 신·증축 같은 눈에 보이는 발전과 성공에 치중하는 경향을 정면으로 지적한 셈이다. 교황은 ‘진정한 성공의 기준’과 관련해 “(예수님이 못 박혀 숨진) 십자가를 보라”고 했다.

“십자가는 성공을 측정하는 다른 방법을 보여줍니다. 우리(성직자)는 씨앗을 심는 사람일 뿐입니다. 우리 노력의 결실은 하느님이 판단하시는 겁니다. 우리의 노력과 활동이 실패했거나 아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사도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속적으로만 보면 예수님의 삶도 실패로 끝난 겁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으니까요.”

9월 25일 오전 유엔본부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만난 교황은 유엔총회 특별연설 뒤 9·11테러 현장인 그라운드제로를 방문했다.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동판 앞에 멈춰선 교황은 “수천 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이곳에서 매우 다른 여러 감정이 든다”고 말문을 열었다. 교황은 죽음과 비극의 현장에서 생명과 희망을 느낀다고도 했다.

“큰 고통과 아픔의 현장에서 여러분은 고귀한 선의와 헌신을 봤습니다. 비인간적이고 고독한 이 대도시 뉴욕에서 여러분은 (9·11테러를 통해) 강력한 연대감과 사랑과 자기희생을 보여줬습니다. (그날) 누구도 종교나 국적이나 정치를 생각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연대감과 형제애만 있었습니다. 뉴욕시 소방관들은 자신들의 안위는 전혀 생각지 않은 채 무너지는 빌딩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그러한 희생이 많은 생명을 구해냈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현장이 삶의 현장이 됐습니다. 파괴와 죽음의 저주를 생명의 노래가, 악의를 선의가, 미움과 분열을 화해와 단결이 이겨냈습니다.”

“삶은 흙먼지 가득한 도로와 같다”

9월 25일 저녁 대형 운동경기나 대규모 콘서트가 열리는 장소인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8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미사를 집전한 교황은 26일 오전 마지막 방문 도시 필라델피아로 향했다. 이곳에서 교황은 100만 명 이상이 참석한 ‘2015 세계 천주교 성가정대회’ 야외미사 등의 일정을 소화했다. 미국을 떠나는 날인 27일 교황은 필라델피아 커런프롬홀드 교도소를 찾아 재소자와 재소자 가족들을 위로했다. 이 교도소는 살인범, 성폭행범 등 죄수 3000여 명이 갇혀 있는 필라델피아 내 최대 감옥이다.

“삶과 역사는 흙먼지 가득한 도로와 같습니다. 인간의 생이란 그 길을 걸으며 발이 더러워지는 여정 같은 것입니다. (재소자 여러분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더러워진 발을 깨끗이 씻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재소자)이 이곳에 있는 단 하나의 목적은 바른 길로 돌아가고, 사회에 복귀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여러분의 재활을 도와야 하고, 여러분의 (재활) 노력에 동참해야 합니다.”

교황은 이날 아침 일찍 어릴 적에 성직자로부터 성추행당한 5명의 피해자와 그 가족을 따로 ‘조용히’ 만났다. 교황은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여러분이 와주신 것 자체가 저에겐 축복”이라며 머리를 숙였다. 이어 “하느님은 여러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여러분을 굳게 믿는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교황은 직후 성마르틴 성당에서 가진 주교들과 면담에서 “성추행 피해자에 대해 마음 깊은 곳에 아픔과 미안함이 있다. 어린이를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권력을 남용했다는 것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교황은 “하느님이 울고 있다”고까지 했다.



주간동아 2015.10.05 1007호 (p58~59)

  • 부형권 동아일보 뉴욕 특파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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