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12

2013.11.11

“‘길 위에서 길 찾기’ 선택이 미래를 만듭니다”

소설가 이문열

  • 정리=김지은 객원기자 likepoolggot@empal.com

    입력2013-11-11 11: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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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아들’ ‘영웅시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우리 시대를 대변하는 굵직한 작품들을 발표하며 대표 작가로 활동하는 소설가 이문열이 10월 28일 삼성그룹이 주최하는 ‘열정樂서’ 부산 콘서트 무대에 섰다. 끝없이 펼쳐진 인생의 길 위에서 그를 지금의 자리로 이끈 것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사실 제가 평생 한 일 중에 제일 자신 없는 것이 물음에 답하는 일입니다. 궁금한 것도, 물을 것도 많은 사람이라 묻는 데는 자신 있지만 대답하는 건 자신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대답을 해야 하는 자리에 종종 서게 됩니다.

    불안을 벗기 위한 선택 ‘글 읽기’

    “‘길 위에서 길 찾기’ 선택이 미래를 만듭니다”
    작가로 자리를 잡고 나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왜 작가가 됐나” “왜 글을 쓰게 됐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질문은 저를 상당히 난처하게 만드는지라 지금도 우물쭈물하곤 합니다. 이상하게도 내가 왜 작가가 됐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작가가 됐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을뿐더러, 그저 살다 보니 어느 날 작가가 된 듯한 기분이 들거든요. 아마도 의식적으로 작가가 되려고 한 기억이 별로 없어서 그런 듯합니다. 왜 그런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가 인식하고 지향하는 것, 방향을 잡아가는 것에는 그전부터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 대한 ‘의지’같은 것이 있어야 하는데, 저는 그 부분에 대해 생각지 않고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인생의 어떤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저 나름대로는 순간순간 여러 갈래 길 중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선택 당시의 위기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바람에 마치 어영부영 걸어오다 우연히 옆으로 길이 또 갈라지면 그 길로 아무 생각 없이 가다가, 그냥 그렇게 도달한 곳이 ‘작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거죠. 이제 나이도 먹었고, 더는 제 인생에 대해 그렇게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적극적으로 제가 한 ‘선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사람마다 삶의 과정을 보는 관점은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물처럼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끊임없이 이어진 공간의 연속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저는 오늘 공간적 명칭보다 시간적 흐름에 빗대어 우리의 삶을 ‘길’이라 표현하겠습니다. 삶에서의 시간을 길에 비유한다면 그 길은 죽을 때나 끝나게 되겠죠.

    우리는 살면서 늘 갈림길과 만나게 됩니다. 사람은 대부분 이 갈림길에서 어느 쪽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무의적으로 선택하기보다 자신의 의식이나 지향을 감안한 결정에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에 일정한 방향이 생기고, 그러다 보면 점차 특별한 기능이나 전문성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렇게 가다가다 보면 더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온 걸 알게 되고, 그때 그 공간 속에서 자신의 구실이나 기능, 가치가 결정되는 거죠.

    제 경우엔 알려진 것처럼 일찍이, 제가 세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어머니와 자식 5남매를 두고 월북해버렸습니다. 당시 월북이란 말은 남은 가족에게 죽음과도 같은 ‘가치 박탈’을 의미했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 30년 전까지만 해도 ‘연좌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뿐 아니라 그 사람의 자손과 옆에 있는 사람, 심한 경우에는 관계가 되는 부족까지 멸하는 이상한 ‘죄의 전가’ 방식인데, 사람들에게 굉장히 겁을 주기 위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네 잘못으로 네 부족을 다 죽였다’, 이러면 굉장히 겁을 먹을 테니까요.

    제가 작가의 길을 걷게 된 배경에는 저 스스로의 ‘선택’보다 이러한 시대적 억압이 작용했습니다. 그 시절 모두가 빈곤을 강요당했지만 제 경우엔 거기에다 제도교육으로부터 소외당하는 일까지 더해졌습니다. 보통은 대학 졸업 때까지 16년 정도 학교교육을 받는데 저는 어쩌다 그중 8년을 학교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때 전학을 가게 되면 전학증을 받아야 했습니다. 전학증 없이 학교를 옮기면 6개월간 학교에 나갈 수 없었어요. 그래서 다른 아이들에겐 두 달인 방학이 제겐 8개월로 길어지곤 했습니다.

    제도교육과 또래집단에서 떨어져 혼자 보내야 하는 긴 시간, 저는 그때 ‘학교에 나가 공부할 수는 없으니 비슷한 방법으로 주변에 있는 책이나 주워 읽자’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저는 이것을 내면적 선택이 아닌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떠밀린 일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제 선택의 지향이나 가치를 인정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심심해서 책을 읽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여가’를 활용하는 방법으로 책을 선택한 것이 제 인생의 갈림길에서 첫 번째 선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릴 때 집에 혼자 있자니 굉장히 지루하고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책 읽기는 두 가지 구실을 했습니다. 하나는 위로이고, 또 다른 하나는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꼭 필요한 옷과 같은 구실이었죠. 그 옷을 입으면서 저는 인문학적인 사람으로 결정됐던 것 같습니다.

    언어의 데생을 연습하다

    “‘길 위에서 길 찾기’ 선택이 미래를 만듭니다”

    소설가 이문열 씨가 개그맨 정성호의 사회로 ‘열정樂서’ 콘서트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렇게 한참 길을 가다 보니 글의 수신자 처지에서 벗어나 발신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단순히 위로나 피난처가 아닌, 글 읽기의 다른 효용을 보게 된 거죠.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어떤 일을 할 때 글과 말을 잘 다루지 못하면 그 일이 그다지 쓸모없고 효용성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실제로는 굉장히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말을 잘 못하는 바람에 그다지 능력 없어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 실상은 별 능력이 없는 사람인데 대접을 잘 받으며 주도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말도 잘하지만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을 아주 잘 정리해서 멋진 책으로 만들어내고 타인들에게 전달함으로써 실제보다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이런 점을 일찌감치 깨달은 저는 그냥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말과 글을 사용하는 능력을 기르며 다음 길로 접어들게 됐습니다. 어떤 사물에 대해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저 혼자 생각해낸 방법으로 ‘언어의 데생’이란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술이란 이름으로 여러 가지를 표현합니다. 감정을 음으로 표현하는 사람은 음을 연구하고, 선과 색으로 표현하는 사람은 선과 색을 연구하죠.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말과 글도 연구할 수 있지 않을까. ‘언어의 데생’은 그런 엉뚱한 생각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글을 쓸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외모나 모양, 눈길 뒤에 숨어 있는 말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시계를 가지고 데생을 하라고 했을 때 가장 크게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글의 양입니다. 연마하지 않은 사람은 시계의 겉모양이나 기능만 표현하려 합니다. 단순히 하나의 개체로 완성된 용도나 모양, 질이 아니면 쓸 말이 별로 없습니다. 5~10줄 이상을 쓸 수 없는 거죠.

    실패가 가져다준 새 선택

    “‘길 위에서 길 찾기’ 선택이 미래를 만듭니다”

    소설가 이문열 씨는 겉모습 뒤에 숨어 있는 말을 포착하는 능력이 글쓰기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조금만 빗겨나면 시계 뒤에는 엄청난 말이 숨어 있습니다. 시계가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라든지, 놓여 있는 자리 등 우리가 늘 보는 것 외의 다른 것으로 상상력을 확장하면 굉장히 다른 말들이 나오죠. 이런 말들을 찾아서 필요한 것을 취하고 불필요한 것을 버리며 원고지 20장 정도로 추리면 ‘시계’라는 제목의 수필이 완성됩니다. 그땐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저는 언어의 데생을 시작했고 두 번째 다른 갈림길에 접어들었던 겁니다.

    사실 1960년대 후반 정도까지만 해도 남자가 평생을 바쳐서 할 만한 일인가라는 점에서 ‘글쓰기’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었습니다. 저 역시 불안하고 공허한 기분에 빠져서, 이러다 내 삶을 낭비하게 되는 건 아닌가 싶은 걱정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연좌제는 제게 미리 결정된 앞날을 제공합니다. 공무원이나 경찰간부, 군인장교 같은 건 절대 할 수 없고, 외국에 나가서 공부하는 것도 단념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대학 갈 때 이것저것 관련 학과를 다 빼고 나니 국사와 국어만 남았습니다. 두 학과를 놓고 고민하다 글에 미쳐본 경험을 바탕으로 국문과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20대 젊은이였던 제게 문학가의 길은 대단히 불완전하고 불안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입학 첫해에 대학을 그만둬버렸습니다. 그 후 한 해를 떠돌아다녔는데 그래도 별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졸업이나 해야지 하고 학교에 다시 갔고, 그때 처음으로 전문 문학가가 되려고 노력하는 조직을 만났습니다.

    1년 정도 열심히 글을 쓰면서 조직 내에서 칭찬도 상당히 받고 자부심도 생겼습니다만, 그래도 진로를 결정하기 전 한 번만 더 다른 도전을 해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도전한 것이제 약력에 나오는 ‘떨어진’ 사법고시입니다.

    사실 고시에 실패하더라도 새로운 분야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글쓰기에 도움이 될 거란 생각도 했습니다. 실제로 법학 공부는 제 글쓰기에 소중한 자원이 됐습니다. 문학은 법 이상으로 정확한 어휘 선택과 논리성을 필요로 합니다. 치밀하고 복잡한 논리를 바탕으로 한 문학은 굉장한 힘을 갖게 됩니다.

    과거에는 “어느 날 작가가 됐다”고 말하며 제 선택의 순간을 간과했습니다. 하지만 대학 입시의 경우만 보더라도 마지막 날 이미 수많은 대학 중 하나를 선택했고, 그 결정은 제 인생의 마지막이 아닌 또 다른 갈림길을 선택하게 하는 ‘길 위에서의 길 찾기’였습니다.

    저는 떠밀린 듯하지만 사실은 선택을 통해 제 길을 찾아왔던 겁니다.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택으로 인생의 길이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택의 순간을 그냥 흘려버리지 말고, 앞으로 또 어떤 선택의 갈림길이 눈앞에 나타날지 진지하면서도 엄숙하게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는 크든 작든 모두 ‘의식’과 ‘지향’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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