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12

2013.11.11

중앙은행 기능 클수록 독립성 ‘흔들’

물가안정에서 금융안정·디플레이션 방지로 확대…새로운 정책 과제 도전에 직면

  • 임일섭 우리금융경영연구소 금융분석실장 ilseop.lim@woorifg.com

    입력2013-11-11 10: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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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은행 기능 클수록 독립성 ‘흔들’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가 9월 12일 서울 남대문로 한국은행 본점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이 일단 진정된 2010년 초 국제통화기금(IMF)은 위기 예방을 위한 정책당국의 임무와 거시경제정책의 과제를 되돌아보면서 ‘거시경제정책을 다시 생각한다’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간한 바 있다. 이 보고서는 과거 중앙은행의 정책 목표가 물가안정으로 단순화됐기 때문에 금융위기 예방에 한계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금융 시스템 안정을 위해서는 중앙은행이 거시건전성 감독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특히 디플레이션 우려가 높아지는 시기에는 전통적 통화정책에 안주하지 말고 유동성 공급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IMF 보고서의 주장과 유사한 맥락에서 금융위기 이후 주요국 중앙은행은 통화정책의 기능 및 범위와 관련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왔으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최근 국내외 금융시장의 최대 현안인 양적완화정책이다. 양적완화정책의 공과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지만, 위기 수습과 경기회복에 도움이 된 것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과정에서 중앙은행의 기능이 확대돼 중앙은행의 정치적 독립성이라는 전통적 관념이 흔들린다는 점이다.

    금융위기와 양적완화정책

    IMF 보고서 대표 집필자인 올리비에 블랑샤르에 따르면, 거시건전성 감독을 이유로 정책수단이 다양화하면서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라는 관념이 논란 대상이 되고 있다. 중앙은행 통화정책의 목표 및 수단이 물가안정과 금리정책으로 단순화됐을 때는 정치적으로 독립된 중앙은행이라는 관념이 가능했지만, 금융 시스템 안정을 위해 다양한 거시건전성 감독도구를 활용하게 되면서 정책 목표와 수단 범위에 대한 정치적 논란과 함께 통제 여부가 현안으로 부각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금융위기 이후 중앙은행이 물가안정보다 디플레이션 방지에 주력하면서 더욱 확대된다. 기본적으로 물가안정은 모든 경제 주체에 중립적인 영향을 미치며, 이를 위해 정책금리 조절이라는 단순한 수단을 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중앙은행의 독립성에 대한 특별한 논란을 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기 이후 디플레이션 방지를 위해 특정 물가상승률 수준을 중앙은행의 정책 목표로 제시하고, 나아가 대규모의 양적완화를 추진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인플레이션은 정의상 소득과 부의 재분배를 수반하기 때문에 중앙은행의 정책은 더는 정치 중립적이지 않으며, 양적완화정책은 중앙은행의 전통적 기능과 범위를 뛰어넘는, 말 그대로 비(非)전통적 정책으로서 그 타당성과 유효성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화폐금융이론의 전문가인 미국 앨런 블라인더 프린스턴대 교수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란 통화정책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선택과 운용에서의 자유, 즉 운영상의 자유를 의미할 뿐이며, 통화정책의 목표 자체는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중앙은행에 부과되는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물가안정이라는 비교적 단순한 목표에 한정되던 과거와 달리 금융안정과 디플레이션 방지 등으로 확대된 지금, 중앙은행의 독립성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불충분하다. 현존하는 디플레이션 위험에 대한 정책적 판단을 포함한 통화정책 수립 및 실행 과정에서 어디까지가 중앙은행에 부과되는 목표이고, 또 어디부터 중앙은행의 자율적인 의사결정 영역인지를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다.

    또한 양적완화정책은 정부의 자금조달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부채의 화폐화정책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앙은행의 통화정책과 정부의 재정정책 간 구분도 모호해진다. 양적완화를 통한 저금리 유지는 차입자(정부)에 대한 중앙은행의 보조금 지급과 유사한 효과를 낳으며, 중앙은행의 국채 매입은 정부의 재정지출 재원을 공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은폐된 재정정책’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재정지출을 통한 경기부양이라는 정부의 구실을 사실상 중앙은행이 대행하는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로부터 독립된 중앙은행이라는 관념은 설 자리가 마땅치 않다.

    중앙은행 구실과 위상도 변화

    나아가 양적완화정책은 경제정책에 대한 민주적 통제 원칙의 관점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정부의 예산 수립과 재정 집행은 의회의 통제를 받지만, 그에 못지않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중앙은행의 양적완화정책은 소수의 통화정책 담당자가 좌지우지할 뿐 별다른 민주적 통제 절차를 거치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일종의 은폐된 재정정책으로 이해될 수 있는 양적완화정책이 의회 등을 통한 민주적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은 단지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라는 차원을 넘어, 현대의 서구 민주주의 시스템에 대한 또 다른 도전으로 볼 여지도 있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 정부의 재정 지출과 부채 확대를 극단적으로 반대하는 정파의 명칭(티파티)이 ‘대표 없이는 과세 없다’는 슬로건으로 유명한 1773년 보스턴 티파티 사건에서 유래한다는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 상황을 돌아보자면, 통화정책의 독립성 혹은 유효성과 관련해 또 다른 고려 요인이 있다. 국제경제학에서의 ‘불가능한 삼위일체(impossible trinity)’ 이론을 상기해보면, 자본시장 개방과 환율 안정, 통화정책의 독립성 등 세 가지를 동시에 달성할 수 없으며 최소한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특히 최근처럼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통화정책이 글로벌 자금흐름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우리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위해서는 자본 이동에 대한 일정한 제한이 필요하다. 5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금리를 인하한 직후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 개연성이 불거지면서 우리 시장 금리가 도리어 상승한 사실은 한국은행 통화정책의 독립성과 유효성이 단지 정부로부터의 독립 문제만은 아님을 잘 보여준다.

    금융위기 이후 통화정책의 성격이 변하면서 각국 중앙은행은 새로운 정책 과제와 기존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부로부터의 독립보다 정부와의 협력이 중요해지고,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의 영향을 받을 여지도 커졌다. 또한 우리의 경우 통화정책 유효성을 위해 정부의 거시 및 금융정책과의 적절한 조합이 중요해지고 있다. 정부로부터 독립한 물가안정 수호 기관으로서의 중앙은행이라는 관념이 일정한 역사적 조건의 산물이던 것과 마찬가지로,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중앙은행의 구실과 위상도 변화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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