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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휠체어로 유라시아 횡단 꿈꾸는 박대운 씨

“2만km를 설레는 마음으로 달리고 싶다”

“2만km를 설레는 마음으로 달리고 싶다”

박대운 씨는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북한, 중국, 러시아, 중앙아시아, 유럽 등 18개국 유라시아 횡단을 준비하고 있다. [김도균]

박대운 씨는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북한, 중국, 러시아, 중앙아시아, 유럽 등 18개국 유라시아 횡단을 준비하고 있다. [김도균]

1998년 외환위기로 온 국민이 실의에 빠져 있던 시절, 4년 뒤 한국과 일본에서 열릴 월드컵의 성공을 바라며 유럽 5개국과 한일 양국을 휠체어 하나로 질주한 장애인 청년이 있었다. 그의 도전은 월드컵 성공 개최는 물론, 국민이 자신을 통해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을 얻어 암울한 한국 경제가 빠르게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됐다.


북한 지나 유럽까지 18개국 통과하는 8개월의 대장정

당시 27세였던 박대운(47) 씨는 20년이 지난 지금 또 다른 염원을 안고 유라시아 횡단을 준비하고 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고자 내년 3월 1일 한국에서 출발해 북한을 지나 중국, 러시아, 중앙아시아, 유럽 등 18개국 2만km를 8개월 동안 종주하는 대장정이다. 그는 “나의 도전을 통해 많은 사람이 아픔을 딛고 일어선 우리나라의 과거 100년을 돌아보고, 새로운 100년을 맞이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유라시아 횡단을 계획 중”이라고 말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 유라시아 횡단을 기획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20년 전 유럽과 일본을 종주하면서 느낀 바가 컸다. 당시 일본에서 한 주민이 ‘다리가 없는 사람이 한국과 일본의 다리 구실을 하니 의미가 있다’고 말해줘 큰 힘이 됐다. 또 외환위기 직후라 국민 모두가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나의 도전을 보고 힘을 얻었다는 이들도 있었다. 지난해 불현듯 그때처럼 의미 있는 종주를 해보고 싶다는 결심이 섰다. 지금은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미래 세대에게 큰 의미가 될 만한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여러 생각으로 기획을 했고 내년 3·1운동 100주년, 2032년 남북올림픽 유치 희망 등으로 좁혀졌다. 이런 와중에 남북 화해 분위기가 형성돼 한국에서 출발해 북한을 통과하고, 유럽까지 가는 여정이 꿈이 아닌 현실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북한을 통과해 유라시아 횡단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 

“북한 통과 계획은 지난해 11월에 세웠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어린 시절 스위스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서구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무의식중에 사회적 약자를 고려하는 마인드가 깔려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올해 들어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졌고, 교황의 북한 방문까지 점쳐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물론 북한을 통과하지 않고 비행기로 중국으로 가 출발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꼭 북한을 거쳐 가는 것이 여러모로 메시지가 클 것 같아 정부 부처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3월 1일 출발이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준비는 어느 정도 됐나. 


“북한을 지나간다는 가정 하에 산악용 휠체어를 준비하고 있다. 또 평지에서 속도를 낼 수 있는 사이클 휠체어도 마련할 계획이다. 20년 전에는 친구와 단둘이 배낭 하나씩 메고 아무런 계획 없이 떠났다. 하루는 유럽에서 텐트를 치고 자는데 경찰에 걸려 쫓겨나기도 했다. 이번에는 체계적으로 종주하고자 팀을 만들 계획이다. 도와주겠다고 하는 사람도 많고, 후원사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다. 윤곽이 드러나면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캠핑카를 준비해 떠날 계획이다. 또 자체적으로 드론 카메라를 마련해 종주하는 모습을 촬영한 뒤 유튜브에 올려 소통할 생각이다.” 

유라시아 중에서도 어떤 곳을 지나는지가 중요할 것 같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한다는 의미를 살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곳들을 지나고자 한다. 또한 독립운동가 후손 가운데 아직도 러시아, 중국, 중앙아시아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다. 기회가 된다면 파독 광부와 간호사, 입양아 등도 만나고 싶다. 지금 종주 계획을 지인들에게 알리고 있는데 의미 있다고 생각한 분들이 십시일반 지원해주고 있다. 해외 한인회를 통해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체력 관리 꾸준히 해 걱정 없어”

1998년과 1999년 박씨는 2002년 한일월드컵 성공 개최의 염원을 안고 유럽과 일본을 종주해 많은 이에게 감동을 남겼다. 일본 종단 당시 모습(왼쪽)과 한국 임진각에 최종적으로 도착한 당시 모습. [사진 제공 · 박대운]

1998년과 1999년 박씨는 2002년 한일월드컵 성공 개최의 염원을 안고 유럽과 일본을 종주해 많은 이에게 감동을 남겼다. 일본 종단 당시 모습(왼쪽)과 한국 임진각에 최종적으로 도착한 당시 모습. [사진 제공 · 박대운]

1998년 유럽 5개국 2002km, 1999년 한일 양국 4000km를 종주했는데 대학교 2~3학년이던 당시 어떻게 가능했는지 궁금하다. 

“대학생 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무모한 도전을 했다.(웃음) 경비를 아르바이트로 마련할까 했는데 가능할 것 같지 않아 기획안을 만들어 여러 기업에 후원을 요청했다. 항공권은 대한항공, 휠체어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원해줬다. 1998년 유럽 횡단을 한 것이 매스컴을 통해 알려져 이듬해 한일 종단은 후원을 더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일본 재일민단이 각 지부에 연락해 거처를 마련해주고 모금을 통해 당시 100만 엔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국내 방송에서도 다큐멘터리로 방영해 여러모로 의미가 깊었다.” 

지금은 40대 후반을 바라본다. 8개월간 종주가 체력적으로 가능할 것 같나. 

“사실 종주 여정을 짜는 일보다 체력이 더 걱정됐다. 그동안 꾸준히 운동하는 등 체력을 관리해왔지만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 주변에서 염려가 적잖다. 11월 중순 회사에서 제주로 워크숍을 갔는데, 혼자 이틀가량 더 체류하면서 매일 30km를 8시간 정도 달렸다. 해가 떨어진 후에도 달려봤고, 이튿날 무리 없이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여서 자신감이 생겼다. 20년 전에 비해 숙식이 해결되고 스태프도 있어 체력 관리만 잘하면 8개월간 문제없을 것 같다.” 

가족은 8개월간의 유라시아 횡단에 대해 어떤 반응인가. 

“열한 살, 여덟 살 두 아이에게 지구본을 보여주며 아빠가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설명했다. 평소 해외 출장을 자주 다니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8개월 동안 아빠가 없는 상황에 대해 아직까지 감이 없는 것 같다. 어머니는 아직 모르신다. 곧 설명을 해드려야 할 것 같다. 아내는 100% 찬성은 아니지만, 열정적으로 사는 내 모습을 보고 결혼을 결심했기 때문에 이번 일도 응원해주고 있다.” 

현재 대한장애인체육회 소속 직원인데 회사를 그만두고 가나. 

“회사에서는 공가 처리를 해줄 예정이다.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2032년 남북올림픽 공동개최를 염원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 회사에서도 응원해주고 있다. 특히 올림픽이 끝난 뒤 패럴림픽을 하는데 아무래도 관심이 떨어진다. 그래서 이번에 종주하면서 패럴림픽을 올림픽에 앞서 치르는 방안에 대해서도 적극 의견을 개진할 생각이다.”


긍정으로 이겨낸 유년기, 열정으로 뛰어넘은 청년기

어린 시절 사고를 당하기 전 어머니, 형과 찍은 사진(왼쪽). 토종닭을 맨손으로 들 정도로 어린 시절 박씨는 활달한 아이였다. [사진 제공 · 박대운]

어린 시절 사고를 당하기 전 어머니, 형과 찍은 사진(왼쪽). 토종닭을 맨손으로 들 정도로 어린 시절 박씨는 활달한 아이였다. [사진 제공 · 박대운]

박씨는 여섯 살 때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잃었다. 도로가에서 동네 형들과 놀던 중 그를 보지 못한 운전자가 사고를 낸 것. 대수술 끝에 일주일 뒤 눈을 떴을 때 그는 결코 피할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그러나 워낙 성격이 밝은 박씨는 사고 후에도 긍정적 에너지로 편견을 이겨내고, 보통 사람보다 더 잘나갔다.
 
사고 당시 기억이 나는가. 

“지금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생생히 기억한다. 대구MBC 앞에는 대구에서 제일 넓은 도로가 있는데 근처에 살아서 자주 놀러다녔다. 하루는 동네 형들과 우리 형제 사이에 승강이가 벌어졌고, 누가 때리려 하기에 그걸 피하려다 사고가 났다. 후진하던 차였는데, 당시에는 ‘사고를 내면 병신 만드는 것보다 죽이는 게 낫다’는 의식이 팽배해 운전자가 나를 한 번 더 쳤다. 병원에 실려 갔고 일주일 만에 눈을 떴다. 당시 의료기술이 낙후된 탓도 있지만 근육이 다 떨어져 나간 상황이라 다리를 살리기 힘들었다고 한다.”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를 나왔고, 초등학생 때는 반장까지 했다고 들었다. 

“워낙 어릴 때라 그런지 충격이 크지 않았다. 사고 후에도 밝게 지냈는데, 동네 분들이 ‘아직 철이 없어 밝지, 철들면 비관하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기도 했다. 물론 힘든 때도 있었지만 좋은 어머니 밑에서 밝게 자랐다. 또 일반학교를 다닐 때 친구들이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배려해줬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가장 어려웠던 체육과목에서도 ‘우’를 받아 전 과목 ‘우’ 이상으로 2학기 반장 선거에 나가 뽑혔다.” 

대구대 서양화과를 다니다 연세대 신문방송학과에 다시 입학했다. 

“공부를 못하지는 않았다. 원래 한의대를 시험 봤는데 떨어졌다. 그림도 좋아해 친구 따라 학원에 다니면서 수능(대학수학능력시험)을 다시 보고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좀 더 소통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물일곱 살에 수능을 다시 보고 1997년 연세대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갔다.” 

대학 때 종주를 기획할 정도면 학교 생활도 열정적으로 한 것 같다.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편이었다. 장애인 인권 동아리 ‘게르니카’에 들어가 계단만 있는 강의실,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는 도서관 등 문제점을 학교에 지적해 개선해나갔다. 유럽·한일 종주 프로젝트를 기획하면서 팀을 꾸려 추진했다. 그때 학교 친구들이 적극 도와준 덕분에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2005년에는 개그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는데 어떻게 하게 됐나. 

“그것도 인맥이 꼬리를 물어 출연하게 됐다. 가수 강원래 씨가 사고로 연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는데 병원 사회사업팀에 대학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가 나이 차도 얼마 나지 않고 상황도 비슷한 내가 강씨에게 힘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선배 소개로 강씨는 물론, 몇몇 연예인도 알게 됐는데 당시 개그맨 홍록기 씨가 ‘폭소클럽’에 출연하고 있었다. 외국인 노동자의 애환을 다룬 ‘블랑카’라는 코너가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고, 제작진이 사회적 약자를 소재로 한 개그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홍씨가 나를 추천했다. 오디션을 보고 무대에 섰는데 초반에는 관심을 끌었지만 원래 개그맨을 준비한 게 아니라서 6개월가량 하다 그만뒀다. 이듬해 현 회사에 취직해 현재까지 일하고 있다.”


“가족은 나의 힘, 아이들 덕에 웃어”

대학 시절 휠체어 사이클을 하는 모습. [사진 제공 · 박대운]

대학 시절 휠체어 사이클을 하는 모습. [사진 제공 · 박대운]

2005년 개그프로그램에 출연할 때 결혼했다. 아내와는 어떻게 만났나. 

“아내는 2003년에 만났다. 1998년 지방 한 방송사의 다큐멘터리에 나온 내 모습을 인상 깊게 본 아내가 2002년쯤 지상파 다큐멘터리에 다시 나온 나를 보고 궁금해졌다고 한다. 아내는 열심히 사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1998년 열정적으로 살던 내가 3년 뒤에는 우울하게 보여 힘을 주고 싶은 마음에 인터넷 검색을 통해 e메일을 보내왔다. 2003년 처음 만났고 연애를 했다. 아내가 무남독녀 외동딸이라 처가에서 반대했지만 주변 친척들이 좋게 얘기해준 덕에 결혼할 수 있었다.” 

두 아이의 아빠가 됐는데 아이들과는 잘 지내는 편인가. 


“아내가 주말에도 일을 하기 때문에 주말에는 오롯이 혼자 아이 둘을 본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아빠가 아니라 ‘엄빠’로 생각하는 것 같다.(웃음)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 스마트폰 좀 그만해라 등등 잔소리를 꽤 하는 편이다. 아이들은 아빠의 장애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심지어 장애를 벼슬로 여기는 것 같다. 둘째아이가 친구와 말싸움하다 자랑인 줄 알고 ‘우리 아빠 장애인이야!’라고 했다고 한다. 첫째아이도 장애인 주차구역에 주차하는 사람들에게 한 소리하는 나를 보고 ‘대통령이 높아, 아빠가 높아?’라고 묻더라. 어릴 때부터 교육받으면 편견 없는 사람으로 자라게 되는 것 같다.” 

100세 시대 인생의 정점에 서 있다. 돌아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참 잘 살았고, 운도 좋았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것도 경험했다. 스티브 잡스가 ‘죽을 때 재산을 가져갈 수 없지만 좋은 기억은 가져갈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런 면에서 나는 경험부자다. 가족만 아니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다.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지금까지는 나를 위한 삶이었으니 앞으로는 남을 돕는 삶을 살고 싶다.” 

3·1운동 100주년 기념 유라시아 횡단에 나서는 각오 한마디 부탁한다. 

“거창하지는 않다. 이번 횡단을 지금 기획하는 대로 무사히 잘 마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 프로젝트 제목이 ‘행복한 세상을 위한 설레는 모험’인데, 나의 여정을 본 많은 사람이 각자의 삶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주간동아 2018.12.14 1168호 (p20~23)

  • 정혜연 기자 grape0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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