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팅을 외치는 ‘레밀리터리블’ 제작진. 앞줄 맨 오른쪽이 정다훈 중위. 뒷줄 맨 오른쪽이 김경신 중위, 그 옆이 김건희 병장, 네 번째가 방성준 상병.
중독성 강한 리듬, 센스 넘치는 노랫말, 수준 높은 가창력이 어우러진 ‘레밀리터리블(Les Militaribles)’. 한국 공군이 자체 홍보용으로 제작한 이 13분짜리 동영상의 돌풍이 거세다. 2월 6일 인터넷 동영상 공유사이트 유튜브에 처음 공개돼 하루 만에 조회수 41만 건을 기록한 이래, 보름째인 2월 20일 낮 12시 현재 조회수는 410만3470건. 댓글도 6995개나 달렸다.
레밀리터리블은 지난해 12월 개봉돼 뮤지컬 영화로선 최초로 국내 누적관객 500만 명을 돌파한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감독 톰 후퍼)을 군인 시각에서 패러디한 동영상. ‘군대 뮤지컬 단편영화’를 표방한 만큼, 겨울철 힘겨운 제설작업에 얽힌 공군 장병의 애환 및 동료애를 레미제라블 전개구조와 뮤지컬 형식에 대입해 표현했다. 공군 비행장에 쌓인 눈을 치워야 하는 장발장 이병과 제설작업을 감독하는 당직사관 자베르 중위, 장발장을 면회 온 여자친구 코제트, 동료 병사가 엮어내는 코믹하면서도 감동적인 에피소드가 그 줄거리. 장발장 이병은 제설작업을 강요하는 자베르 중위 때문에 결국 코제트에게서 이별통보를 받지만, 동료애를 통해 평정심을 되찾고 봄이 오길 기다린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성악 전공자 출연, 높은 완성도
레밀리터리블이 유튜브를 달구자 외신보도도 잇따랐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레밀리터리블은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만큼 전염성이 강하다”면서 인기가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으며 월스트리트저널, 영국 인디펜던트와 텔레그라프, 아랍권 알자지라 영어방송도 앞다퉈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레미제라블에서 자베르 경감 역을 맡은 배우 러셀 크로가 직접 트위터에 레밀리터리블 동영상을 리트위트한 것도 국내외 인기 상승에 탄력을 더했다.
“여기 오면서 아직도 눈 잔뜩 쌓인 것 보셨죠?”
2월 18일 충남 계룡시 계룡대 공군본부에서 만난 레밀리터리블 제작자 김경신 중위와 감독 정다훈 중위는 대뜸 “눈 덕분에 ‘대박’ 났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날도 계룡대 제2정문 입구에선 연일 이어진 영하 날씨 탓에 채 녹지 못해 인도에 얼어붙은 눈을 치우는 제설작업이 한창이었다.
두 중위 말대로 레밀리터리블 제작은 눈에서 비롯됐다. 공군본부 정훈공보실 미디어영상팀 소속인 이들은 부대 밖 아파트에 함께 거주하는 룸메이트. 1월 1일 아파트에서 와인을 즐기던 두 사람은 “올해엔 어떤 공군 홍보물을 만들까” 논의하다 문득 올겨울 유난히 잦은 눈을 떠올렸다. 둘 다 레미제라블을 일찌감치 관람한 터. 영화 속 장발장의 힘든 노역을 군인에게 골칫덩이인 제설로 대체하고, 해당 장면에서 인상 깊게 흘러나오는 노래 ‘Look Down’을 개사하면 뭔가 재미있는 ‘작품’이 만들어질 것 같았다. 레밀리터리블 기획 아이디어는 이렇듯 와인과 건배 속에서 탄생했다.
바로 다음 날 미디어영상팀 직속상관인 권용은 중령과 천명녕 소령에게 허락을 받자마자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제작 전반을 김 중위가 담당하고, 정 중위는 레미제라블 OST의 음악 선곡과 편곡, 개사, 자막 처리를 맡았다. 개사는 원곡 느낌을 최대한 살리되 공군에 맞는 내용으로 바꿨다. 레미제라블에서 자베르 경감이 장발장을 부를 때 항상 외치던 죄수번호 ‘24601 (Two-Four-Six-O-One)’은 레밀리터리블에서도 장발장 이병의 군번 ‘24601’로 차용했다. 레미제라블 속 대표곡들인 ‘I Dreamed a Dream’ ‘Come to Me’ ‘Red and Black’도 동영상 짜임새에 맞게 적절히 원용했다. 동영상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하지만 난 괜찮아 곧 봄이 와’라는 긍정적 메시지를 담은 엔딩 곡은 영화 끝에 등장하는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Do You Hear The People Sing)?’를 빌려 훈훈한 분위기를 불어넣었다.
레밀리터리블의 높은 완성도는 제작진 이력과도 무관치 않다. 한국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 출신인 김 중위(학사장교 124기)는 2009년 유엔 공보국(DPI) 주최 비핵화 관련 동영상 공모전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한동대 시각디자인학부를 졸업한 정 중위(학사장교 127기)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아트를 전공했다. 촬영감독 방성준 상병 역시 중앙대 연극영화과 2학년을 마치고 입대하기 전 ‘학생영화’ 제작 경험이 있다.
출연배우(?)도 하나같이 성악 전공자들. 장발장 이병을 연기한 이현재 병장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자베르 중위 역의 김건희 병장(이상 계룡대 근무지원단 공군군악대 소속)은 독일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당초 자베르 중위 역에 김 병장 후임병이 물망에 올랐지만, 이 병장이 자신의 신병훈련소 및 군악대 동기인 김 병장에게 “제대 전 함께 연기하자”고 권유해 김 병장이 낙점됐다. 코제트 역을 맡은 이민정 중위(공군사관학교 군악대 근무)도 계명대 성악과 출신. 연주 또한 군악대 장병들이 맡아 수준을 한껏 높였다. 주인공뿐 아니라 조연, 단역 연기에도 공군 장병 70여 명이 힘을 보탰다.
다음 작품은 ‘바른 먹거리’ 홍보 동영상
실력파들의 시너지 효과 덕분일까. 기획부터 녹음작업, 촬영, 추가 촬영, 최종 편집까지 걸린 기간은 한 달 남짓. 제작비도 지미집(무인카메라 크레인) 대여료 55만 원을 빼면 간식비 50만 원, 주요 배우 10여 명의 레미제라블 관람료와 배역 이름표 제작비가 추가된 게 전부다.
애초 정 중위가 목표한 유튜브 조회수는 15만 건. 2011년 1월 공군 공식 블로그 ‘공감’과 유튜브에 게재돼 인기를 끈 10초짜리 홍보 동영상 ‘급양병의 하루’가 기록한 16만 건과 비슷할 것으로 봤다. 정 중위는 “뮤지컬 동영상인 만큼 제작과정에서 음악을 워낙 중시하다 보니 연기에 많은 신경을 쓰지 못한 게 연출자로서 아쉽다”면서도 “한글과 함께 영어 자막을 넣은 것이 외국에서도 인기를 끄는 데 주효한 것 같다”고 기뻐했다.
공군에서 제설은 작전상 매우 중요하다. 항공기가 이착륙하는 활주로에 쌓인 눈을 치우는 데는 통상 ‘SE88’(항공기 엔진을 개조한 제설장비. 엔진 열과 바람을 이용해 눈을 제거함)을 쓴다. 하지만 레밀리터리블에선 일부러 정기 비행이 이뤄지지 않는 계룡대 비상활주로를 택해 ‘삽질’ 장면을 촬영했다. 그 밖의 촬영장소는 계룡대 내 면회공간인 개나리회관과 내무반, 군악대 합주실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레밀리터리블 무대로 첫 장면 자막에 등장하는 ‘22전투비행단’. 동영상에 열광한 상당수 누리꾼이 22전투비행단에 보내는 많은 격려 댓글을 달았지만, 그 글을 본 해당 부대원은 단 한 명도 없다. 공군 편제상 20전투비행단까지만 존재한다. 22전투비행단이라고 이름붙인 까닭은 지난해 8월 가수 비(정지훈)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선보인 영화 ‘알투비 : 리턴투베이스’ 배경이던 부대 명칭이 가상의 ‘21전투비행단’이었기 때문. 2월 12일 3차 핵실험을 강행한 북한이 레밀리터리블을 혹 접했다면 새로운 공군 부대가 생겼다고 놀라진 않았을까. 장발장 이병과 코제트의 면회 장면에 등장하는 피자 상자도 사실 빈 상자다.
제작진 스스로 분석하는 인기 요인은 뭘까. 정 중위는 “군복무, 제설, 여자친구와의 이별, 흥행영화 레미제라블이라는 소재에 대한 대중의 공감대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미디어영상팀장 권용은 중령은 “공군을 적극 홍보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소재와 형식에 특별히 제한을 두지 않으며, 대세에 지장이 없는 한 상관이 결과물에 손대지 않는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팀 문화 덕에 항상 참신한 기획 아이디어가 나온다”면서 “레밀리터리블은 평소 쌓아온 팀원 간 두터운 신뢰감을 바탕으로 철저히 보텀 업(bottom up) 방식으로 만들어졌다”고 밝혔다. 재기발랄한 제작진의 다음 작품은 천연조미료를 사용하는 공군 급식을 소재로 한 ‘바른 먹거리’ 홍보 동영상이란다.
2월 15일 유튜브엔 레밀리터리블 ‘회의판’ 패러디라고 밝힌 동영상 ‘레미팅테러블’이 올랐다. 쿠 퍼실리테이션 그룹 대표와 직원이 합심해 회의에 지친 리더와 구성원에게 희망이 되길 기원하려고 만들었다는 이 뮤지컬 형식 동영상은 이런 노랫말로 시작한다. ‘회의, 회의, 이 지루한 회의. 회의, 회의, 이 지겨운 회의….’
한국 대중문화의 주요 코드로 자리매김한 패러디. 패러디는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