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주간동아’ 1332호에 ‘야구광 윤석열’ 기사가 실린 후 지인과 야구인들로부터 많은 성원과 격려를 받았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야구팬인 건 이미 알려졌지만 그 뿌리가 대광초 때부터, 그리고 바쁜 검사 생활 중에도 야구인들을 진정으로 챙겼다는 것에 감동받았다는 이가 적잖았다.

윤 당선인은 5월 10일 20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한다. 취임 초기에는 거대 야당과 협치, 복잡다단한 안보와 외교, 경제 살리기 등 주요 현안 챙기기에 바빠 야구에는 곁눈질할 시간조차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국정이 안정되면 윤 당선인의 야구 사랑도 다시금 살아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더욱이 올해 프로야구는 출범 40주년을 맞았다. 역대 대통령의 야구 사랑도 되새겨볼 만하다.

먼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1903년부터 미국 조지 워싱턴대(학사), 하버드대 대학원(석사), 프린스턴대 대학원(박사)에서 유학하며 일찍 선진 야구를 접했다. 하지만 나라를 잃은 상심에 단 9년 만에 학사·석사·박사학위를 따느라 학업에 매진해야 했고, 취미 생활은 할 겨를이 없었다. 1948년 대통령이 돼서도 건국 초석을 다지느라 야구 등 스포츠는 안중에도 없었다.

대통령 시구 소식 누설은 경호법 위반

그러나 독립운동가 출신답게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했다. 1954년 12월 초, 필리핀에서 열리는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출전을 앞두고 한국 국가대표팀은 서울 을지로3가 협성여관에서 합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12월 14일 출국을 하루 앞두고 출정 신고식을 하라는 경무대 측 통보가 있어 다음 날 대표팀은 경무대를 예방했다.

이 자리에서 이 전 대통령은 “베이스볼은 일본이 잘하지? 하지만 스피릿(spirit: 정신, 영혼)은 지면 안 돼!”라고 영어를 섞은 특유의 어눌한 말투로 격려했다(‘백구와 함께한 세월: 장태영의 야구인생 70년’에서 발췌). 결과는 이 전 대통령의 기대를 저버리고 일본에 0-6으로 완패했다. 전력 차가 너무 커 정신력으로 버티기엔 무리였다.



윤보선 4대 대통령은 영국 유학, 박정희 5~9대 대통령은 군, 최규하 10대 대통령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 유학 출신이라 모두 야구와는 인연이 없었다. 단, 박 전 대통령은 1976년 제1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개막전 시구자로 나선 바 있다. ‘제1회 대통령배’로 상징성이 있는 만큼 주최 측이 적극 설득한 결과로 풀이된다.

김영삼,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시구

대구공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시절 축구 골키퍼로 활약한 전두환 11~12대 대통령 역시 야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체육관 선거’로 정권을 잡은 취약한 정통성을 덮기 위한 주요 통치 수단으로 스포츠를 적극 이용했고, 그 일환으로 1982년 프로야구를 출범시켰다. 그해 3월 2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전 전 대통령은 시구를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돌발사고가 일어났다. 대통령이 시구를 한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KBO(한국야구위원회) 심판들은 미리 알고 있었다. 그 심판 중 한 명이 K 씨였는데, 개막 일주일 전 다른 심판들과 동대문야구장 앞 식당에서 소주를 한잔하면서 얼결에 ‘기밀’을 흘리고 말았다. 그런데 주변에 있던 일반인이 이를 듣고 얘기를 퍼뜨리는 바람에 동대문야구장 주변을 탐색하던 대통령경호실 경호원이 이 사실을 알게 됐다. 대통령 동정을 사전에 누설하는 것은 경호법 위반으로 K 씨는 대통령경호실에 불려가 며칠간 혼이 났다. 급기야 그가 맡기로 했던 개막전 주심 자리 또한 후배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노태우 13대 대통령은 야구 명문 경북고 출신이다. 하지만 그가 학교에 다닐 때는 야구부가 없었고, 노 전 대통령도 야구를 잘 몰랐다. 경북고 전성기는 1970~1980년대다. 김영삼(YS) 14대 대통령은 야구 명문 경남고 출신이다. 김 전 대통령은 야당 정치인 시절 모교팀 응원을 위해 고교야구대회를 여러 번 참관했다. 1969년 5월 경남중고 기별야구대회 때는 외야수 출전 기록도 세웠다. 1994년, 1995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 시구도 했다. 1994년 10월 18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있었던 YS 시구는 사실 필자 작품이다. 당시 모 스포츠신문 야구부 차장이던 필자는 10월 초쯤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으로 있는 고교 동기에게 YS의 한국시리즈 시구를 비공식적으로 요청했고, 이를 YS가 받아들였다. 행정관이 멋모르고 전화로 YS 시구를 미리 알려왔는데, 필자는 경호법이고 뭐고 기사 욕심에 다음 날 신문 1면에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경호상 시구가 취소될 수도 있었으나 YS의 시구 욕심이 컸는지 결국 성사됐다. 야구와 무관한 목포상고를 나온 김대중 15대 대통령은 관련 스토리가 없다.

오랜 야구부 역사를 자랑하는 부산상고 출신인 노무현 16대 대통령의 야구 사랑은 대단했다. 2003년 대전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올스타전 시구를 담당했고, 야구선수 출신을 총무비서관실 행정관으로 4년간 특채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고교 1년 선배인 강병철 씨는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명박 17대 대통령은 2008년 4월 개막전 시구를 할 예정이었으나 사전에 정보가 유출되는 바람에 경호상 이유로 취소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박근혜 18대 대통령은 2013년 10월 27일, 문재인 19대 대통령은 2017년 10월 25일 한국시리즈에서 각각 시구했다. 경남고 출신인 문 대통령은 필자의 2년 선배로,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문 대통령은 야구보다 축구를 좋아했다.

지난해 11월 대선 후보 시절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한국시리즈를 관람한 윤 당선인은 역대 대통령 중 야구 열정이 가장 클 것으로 짐작된다. 올해 11월 초 열리는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윤 대통령의 멋진 시구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