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빌리은행이 채무자에게 보내는 빚 탕감 통지서. 주빌리은행 제공
이재명 정부가 7년 이상 장기 연체된 5000만 원 이하 채권을 매입해 빚을 조정하거나 탕감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중위소득 60% 이하거나 소득이 거의 없는 113만 명이 혜택 대상이다. 빚 탕감은 정부가 바뀔 때마다 반복돼왔고, 그때마다 “성실하게 갚은 사람은 뭐가 되느냐”는 비판이 따라붙었다. 도덕적 해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여전하다.
이런 논란에도 10년 전부터 실제로 빚을 ‘없애온’ 은행이 있다. 주빌리은행(현 롤링주빌리)은 2015년부터 장기 연체 채무 약 8100억 원을 소각했다. 지난 10년간 이곳을 찾은 상담자만 5만1000명으로, 대부분 20년 이상 된 1000만~3000만 원 소액 채권을 안고 있었다. 누군가는 20년이면 충분히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금액이다. 왜 주빌리은행은 남의 빚을 없애줄까. 10년째 현장에서 일하는 유순덕 상임이사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누구나 채무자 될 수 있다
주빌리은행은 기업, 정치인, 시민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시민단체다. 이름은 은행이지만, 사실상 빚을 없애주는 단체에 가깝다. 이들은 ‘묵은 빚’을 헐값에 사들인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금융사는 3개월 이상 연체된 채권을 오래 들고 있으면 제재를 받기 때문에 이를 한꺼번에 묶어 채권시장에 싸게 내놓는다. 이곳에서 원금 100만 원짜리 채권은 평균 5만~10만 원에 거래된다. 주빌리은행은 이렇게 넘겨진 부실 채권을 사들여 소각한다. 법적으로 돈을 받아낼 권리는 생기지만, 빚이 탕감됐다는 통지서만 보낼 뿐 갚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빚을 없애주는 것이다. 채무자 본인도 통지서를 받고 나서야 수십 년간 안고 살았던 빚이 정말 사라졌다는 사실을 실감한다.“그럼 빚 갚은 사람만 손해 아니냐”는 비판은 늘 있어왔다. 유 이사도 이 질문이 익숙하다. 그는 “20년 넘게 방치된 채무는 개인의 일탈이라기보다 사회구조적 문제”라고 강조한다. “빚만 많을 뿐 일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 사람을 다시 경제활동에 복귀시키는 것이 오히려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길”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대부업체로 넘어간 장기 연체 채권은 돈벌이 수단으로 바뀐다. 원금 5~10%에 채권을 사들인 대부업체는 원금은 물론, 연체이자와 법정 비용도 청구할 수 있다. 원금만 받아도 90% 이상 이익이 남는 구조다. 한쪽은 평생 신용불량자로 삶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다른 쪽은 그 고통 위에서 수익을 쌓는다. 주빌리은행이 끊고자 하는 건 바로 이 구조다.
그렇다 해도 왜 어떤 사람은 20년 넘게 원금 1000만 원조차 갚지 못할까. 유 이사는 “이들은 채무에 시달리는 부모 아래에서 자란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첫 대출은 대개 학자금대출이다. 졸업 후에도 취업은 쉽지 않고, 어렵게 취직해도 월급 대부분을 이자 갚는 데 쓴다. 소득은 빠듯한데 상환액은 점점 불어난다. 여기에 가족의 병환, 사업 실패, 코로나19 사태 같은 외부 변수가 겹치면 원금보다 이자가 많아진다. 추심이 시작될 경우 통장이 압류되고, 급여 통장이 없으면 정규직 취업이 어려워진다. 결국 저임금 일용직을 전전하게 되고 “오늘도 결제일, 내일도 결제일”이라는 말이 일상에 자리잡는다.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교사나 의사 등도 주빌리은행 문을 두드린다. 처갓집 보증을 섰다가 40억 원 넘는 빚을 떠안은 한 의사는 서초동 아파트까지 팔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유 이사는 “재산을 다 처분해도 평생 갚지 못할 빚이 남는 경우도 많다”며 “도박이나 낭비가 아니라, 단 한 번의 보증으로도 빚더미에 앉을 수 있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소각통지서가 바꾼 삶
빚이 사라졌을 뿐인데 누군가는 삶 전체가 달라졌다. A 씨는 사업 실패로 추심에 시달리다가 가족과 함께 인천 한 섬으로 피신했다. 자녀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더는 숨어 살 수 없어 도심으로 돌아왔지만 추심은 끝나지 않았다. 검은 옷을 입은 추심자들이 집 앞을 서성이면 아이들은 불을 끄고 A 씨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A 씨는 그들이 떠난 것을 확인한 뒤에야 조심스레 집 대문을 열 수 있었다. 그러던 2020년 추석 무렵 A 씨는 주빌리은행의 채권 소각 통지서를 받았다. A 씨는 “보름달이 그렇게 새롭게 보인 건 처음”이라며 유 이사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유 이사는 “진짜 배드뱅크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져야 한다”고 말한다. 과거 정부는 한마음금융(2004), 희망모아(2005), 국민행복기금(2013) 등을 통해 장기 연체 채권을 매입했지만, 문제는 방식이었다.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는 해당 채권을 20~30년 동안 방치하다가 채무자의 경제활동 가능성이 보이면 곧바로 추심을 재개했다. 기초생활수급자가 16년 만에 탈수급하자 곧바로 채권 추심에 나서는 일도 있었다. 유 이사는 “이는 회생 지원이 아니라, 채무자의 회복을 기다렸다가 추심에 나서는 수익 회수 전략”이라고 지적했다. 더불어민주당 김남근 의원실에 따르면 4월 기준 캠코가 보유한 10년 이상 연체 채권은 33만8000건, 원금만 5조 원 규모에 달한다.
유 이사는 “무턱대고 대출을 받기 전에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창구가 더 늘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과거엔 외환위기 여파로 생긴 빚을 수십 년 동안 안고 지내온 중장년층이 많았다면 요즘은 소득이 있어도 빚이 한계에 다다른 20, 30대 청년층의 상담이 적잖다. 파산이나 개인회생을 택하지 않아도 채무조정 프로그램을 통해 충분히 회복될 수 있는 경우가 흔하다는 얘기다. 빚이 있다는 이유로 무너지는 사회가 아니라, 결국 다시 빛을 볼 수 있는 이들이 많아지면 좋겠다는 게 유 이사의 바람이다.

윤채원 기자
ycw@donga.com
안녕하세요. 주간동아 윤채원 기자입니다. 눈 크게 뜨고 발로 뛰면서 취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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