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이 공유하는 빈곤·억압·생존 경험과 서민적 감성을 예술로 승화해 세계인의 찬사를 받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넷플릭스 제공
화려한 무대, 세련된 영상, 감각적 서사 뒤에 감춰진 한국 대중예술의 뿌리는 산업이나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가난, 분단, 억압, 생존이라는 사회적 상처에서 피어난 감정의 힘이며, 이 감정이 세계와 만나면서 감성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제 한국은 단순한 문화수출국이 아니라, 감성을 조직하고 정치화하는 선도국가가 됐다. 우리는 감성을 생산하고 수출한다.
한국인 집단 기억을 예술로 승화한 한류
한류 뿌리를 ‘산업적 성공’이나 ‘기술적 완성도’로만 해석하는 관점은 너무 얕다. 좀 더 본질적 차원에서 한류는 한국인의 집단 기억과 감정 빈곤, 억압, 생존 경험을 예술로 승화한 창조적 저항의 결과물이다.철학은 우리 삶 어디에나 있다. 인문학을 배우고 책을 읽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철학적 해석을 해보는 것은 재미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예술을 “감성의 재분배”라고 말한다. 이는 기존 정치사회 질서에서 배제됐던 감정들을 새롭게 배열하고,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가시화하는 행위다. 바로 이 개념으로 한류를 다시 볼 수 있다.
K-드라마의 신파, K팝의 눈물, K-웹툰의 가족 서사…. 이것 모두 과거에는 ‘촌스럽다’며 조롱받던 서민 또는 하층민 정서다. 하지만 그 ‘낡은 감정’이 지금 세계인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그 감정은 더는 한반도에 갇힌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 불안과 상처를 공유하는 감성 언어로 작동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은 바로 비주류 정서의 미학적 승리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문화자본 이론에 따르면 감성적 취향은 보통 지배계층이 독점한다. 그러나 한류는 엘리트 중심의 서구 미학을 정면으로 전복하며, 가난한 이들의 감정을 세계 중심에 배치한 혁명적 행위다.
한류의 핵심은 감정이지만, 그것은 이제 문화와 산업을 넘나드는 복합 생태계로 진화하고 있다. 문화는 감정에서 출발하지만, 산업이 돼야 지속가능하다. K-콘텐츠 지식재산권(IP) 산업은 드라마, 웹툰, 웹소설이라는 감정의 저장소를 게임, 투어, 교육으로 확장하는 서사의 산업화 모델을 보여준다. 서구의 디즈니와 마블이 구조화된 신화를 수출한다면, 한국은 파편화된 감정과 단절된 가족사로 세계인의 기억을 건드린다.
K-전통주부터 K-스토리까지… 감성의 경제적 확장
이 감정의 산업화를 가장 흥미롭게 보여줄 수 있는 사례로 필자는 K-전통주와 도자기의 결합을 제안한다. 한국 전통주는 일본 사케에 비해 품질과 역사성 면에서 결코 부족하지 않지만, 산업화와 브랜드화 측면에서는 후발 주자다. 그러나 전통주에 담긴 발효의 미학, 도자기와의 미적 융합, 한옥·한복·한식과의 조화는 K-라이프스타일이라는 새로운 글로벌 브랜드 탄생을 가능케 한다. 이는 단지 ‘술을 수출한다’는 경제 전략이 아니라, 감성과 미감, 역사와 철학을 병에 담아 세계로 건네는 행위다.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시작은 교육이다. 한국 전통주는 일제강점기라는 비극의 시간을 거치며 거의 말살됐다. 일제는 가정 내 양조를 금지했고, 조선인의 술 문화는 국가 통제 아래 점차 사라져갔다. 한때 마을마다 전해지던 수백 가지 주방문(酒方文), 즉 우리 술의 레시피와 발효 지혜는 이제 책 속 잊힌 문장으로만 남아 있다.
우리가 ‘전통주’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한 알코올이 아니다. 그것은 쌀과 누룩, 시간과 온도가 함께 빚은 한국인의 감각과 생활 철학, 그리고 발효라는 생명 과정이 만든 미각의 문화다. 술이 자연스럽게 식초로 변하고, 된장이 익는 중간에 간장이 흘러나오며, 김치가 익어가는 과정을 통해 생명이 태어나듯이, 술 역시 우리 발효 문화의 일환이며 미래 감성의 재건 프로젝트다. 전통주를 되살리는 것은 미래 세대가 ‘자신의 술’을 가질 수 있도록 감각의 기초를 되살리는 일이다.
우리는 지금 세계가 가장 필요로 하는 감정을 제공하고 있다. 위로, 공감, 치유, 연대…. 이는 우리가 가난하고 고통스럽던 시절을 통과하며 만들어낸 것이며, 더는 부끄러운 유산이 아니다. 그것은 ‘힘’이 됐다. 한류는 이제 하나의 브랜드가 아니라, 세계 감성의 질서를 재편하는 예술적 행위다. 한국 콘텐츠는 한국인의 고통을 이야기하지만, 그 서사는 세계인의 고통과 맞닿아 있다. 아시아 작은 나라, 그곳의 가난했던 이들의 눈물이 세계인의 감성이 된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한류는 단순한 문화 현상이 아니라 감정의 민주화이자, 예술을 통한 전 지구적 감성 정치다.
문화는 감정을 조직하고, 감정은 선택을 바꾸며, 선택은 경제를 움직인다. BTS, 블랙핑크는 단지 대중문화 스타가 아니다. 그들은 새로운 질서, 새로운 감정의 지도, 새로운 시장을 창출한 감성의 외교관이다. 따라서 문화강국은 단순히 예술을 많이 하는 나라가 아니라, 감정을 움직이고 조직할 줄 아는 나라다. 그 감정을 산업화할 수 있는 철학과 경영능력이 있다면 문화는 경제를 견인하는 엔진이 된다. 한국은 지금 그 엔진을 가동하고 있다. 그것이 한국이 선도국가인 이유다. 우리는 K-이후를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K-이니셔티브(initiative)다.
김재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 경상대학장, 국민대 도서관장과 박물관장, 한국예술경영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