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노동력에 의존한 경제체제 아래서, 또 수직적·종속적인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녀의 출산과 양육은 가족 경제력의 강화, 신분 유지, 가족세력의 확대에 공헌했다. 따라서 당시 어린이들은 가족의 발전과 번영을 돕는 존재로 여겨졌다.
또 부모의 가르침과 양육을 받아야 하는 미성숙한 존재로, 심지어 부모의 소유물로까지 인식됐다. 어린이를 하나의 존재적 가치로 인정하고 성인과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는 데 인색했던 것이다.
동학사상 힘입어 지위 향상
유교의 삼강오륜(三綱五倫) 덕목 중 하나인 장유유서(長幼有序)는 아동과 성인의 차별화를 더욱 구체화했다. 본래 장유유서는 어른과 아이 사이에 지켜야 할 관계에 관한 덕목으로, 연장자가 연소자를 사랑하고 연소자는 연장자를 존경하되 순서에서 연장자를 우선해야 한다고 정한 윤리였다. 그러나 연장자를 무조건 우선시한 나머지 연소자인 아동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 현상으로 해석됐고 그 본질 또한 부정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성인 중심의 아동관은 실학사상이 등장하면서 조금씩 극복됐다. 동학사상에 힘입어 어린이에 대한 차별적 인식도 큰 변화를 맞게 됐다. 동학사상은 어린이를 인격을 가진 독립된 존재로 인정했을 뿐 아니라 성인과 대등한 능력을 지닌 존엄한 존재로까지 여겼다. 또 연령에 따른 차별은 불평등한 것이라고 보고, 태아까지 한 인격체로 존중할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동학사상의 출현으로 뿌리 깊은 아동관이 순식간에 전환점을 맞은 것은 아니다. 아동은 여전히 성인과의 비교에 따라 차별대우를 받았다. 근대에 들어 어린이의 권리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 대표적 인물은 소파 방정환 선생이다. 그는 동학의 아동존중사상을 창조적인 어린이운동으로 계승, 발전시켰다. 방 선생은 “어림(幼)은 크게 자라날 어림이요, 새로운 것을 지어낼 어림”이라고 인식하며 어린이의 잠재된 발달 가능성에 주목했다.
아동 권리에 관한 제네바선언이 채택된 1924년보다 1년 앞선 1923년, 그는 드디어 어린이선언문과 권리공약 3장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고 꿈도 꽃피우지 못하던 당시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1931년 잡지 ‘어린이’에서 신영철 선생은 당시 아동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하고 궁핍했는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조선의 어린이! 그들은 정말 가엽습니다. 간신히 학교를 간대야 월사금이나 학용품 몇 개만 사려 해도 쳐다보게 되고 그나마 학교라고 가보지도 못하는 수만흔 어린이들은 부형들의 꾸지람과 걱정 미테서 땀을 흘려가며 어린 뼈가 휘도록 일하지 안흐면 할 수 없는 형편에 있는 것이 오늘 조선 소년의 처지입니다.”
1919년 3개 면에 1개씩의 보통학교를 세우는 계획이 추진됐지만 학생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입학시험을 통해 희망자의 절반 정도만이 학교 수업을 받을 수 있었고 취학률은 1919년 4.0%, 1926년 17.6%, 1932년 18.9%에 그쳤다. 졸업률 또한 1924년 51.6%, 1928년 44.9%로 매우 저조했다. 학령기 아동이 가족의 ‘일손’으로 생활전선에 나가야 했던 ‘그때 그 시절’ 이야기다. 실제 월사금을 내지 못할 만큼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던 가정이 많던 때이기도 하다.
근대화 이후 경제적, 사회적으로 급격히 발전한 우리 사회에서 어린이의 삶은 한결 나아지게 됐다. 어느 때보다도 풍족한 경제적 번영과 안정 속에서 건강한 삶의 혜택과 좀더 나은 삶을 위한 교육 기회를 제공받게 된 것. 또 급격히 감소하는 출산율로 아동의 절대적 수가 줄어들면서 미래 인적 자원으로서 어린이의 가치는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 아이들은 이전보다 훨씬 크고 많은 불확실성과 위험요인에 노출돼 있다.
전인교육을 존중했던 서당(좌). 어린이날 제정, ‘어린이’ 잡지 창간 등 어린이 권리 보호와 관련된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우리 아이들은 ‘행복’하지 않다.
또 인터넷 중독, 학교폭력, 사교육의 증가는 어린이에게 정신적, 신체적인 위해요소가 되기도 한다. 과거 아동을 위협하던 기본적인 문제들뿐 아니라 이 같은 ‘현대형 문제’까지 더해져, 아동의 권리는 그 종류만 다를 뿐 전통사회 못지않은 큰 위협을 받고 있다.
권리와 함께 새로운 위협도 증가
제1차 세계대전 후, 전 세계적으로 아동의 권리에 대한 큰 각성이 일었다. 이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은 ‘아동에 관한 권리 선언’이 발표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런 선언이 아동의 삶을 실제적으로 변화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세월이 흘러 1989년 유엔총회에서 ‘아동권리협약(Conven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이 만장일치로 채택되면서 비로소 아동의 권리 향상에 진전을 맞게 됐다.
각국 정부로 하여금 아동의 권리 실현을 위한 법적 구속력을 갖추게 한 이 협약은 아동을 보호의 대상이면서 적극적 권리의 주체자로 천명했다. 어른이나 부모에게 예속된 존재가 아니라 독립된 인격을 가진 존재로 보게 된 것. 협약은 4개의 기본원칙을 갖고 있다. 아동의 최선의 이익 원칙(제3조)과 무차별의 원칙(제2조), 생존 및 발달의 원칙(제6조), 참여의 원칙(제12조)이 그것이다.
우리 정부는 1991년 부모면접교섭권(이혼 후 자녀를 직접 양육하지 않는 부모가 미성년의 아이를 만날 수 있는 권리), 입양허가제, 아동의 상소권 보장 등 3개 조항을 유보한 채 이 협약을 비준했다. 정부는 협약 제44조에 의거, 협약의 이행 상황에 대해 1994년 1차, 2001년 2차 국가보고서를 제출했고,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우리나라 아동 권리에 대해 우려되는 사항과 개선점을 제안했다.
2008년 12월에는 제3, 4차 통합국가보고서를 제출했고 현재 이 보고서의 심의를 기다리는 중이다. 그동안 정부는 유엔아동권리위원회의 권고를 이행하기 위해 아동 권리 관련 정책을 전담하는 부서를 신설하고 아동권리모니터링센터를 시범운영하는가 하면 부모면접교섭권을 확보하고, 아동 권리 연구를 지원하는 등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하지만 어린이에게 가장 득이 될 수 있는 일은 여전히 성인의 이해관계나 희망사항에 맞춰 간과되기 일쑤다.
어린이의 요구와 권리는 종종 어린이가 비극적이고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기 전까지 가려져 있다. 어린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보호와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어린이는 엄연한 하나의 인격체이며 한 사람의 시민이다. 단지 미래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준비하는 ‘미숙한’ 존재인 것만은 아니다. 건강하고 안전한, 그리고 행복한 삶을 위한 어린이의 권리보호에 국가와 사회의 투자가 집중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