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씨의 뒤를 이어 서울대 언어학과 과대표를 맡았던 데이나코리아 신상민 부장.
오늘 우리는 뜨거운 눈물을 삼키며
솟아오르는 분노의 주먹을 쥔다…
누가 너를 앗아갔는가
감히 누가 너를 죽였는가…
살아서 보지 못한 것 살아서 얻지 못한 것
인간, 자유, 해방
죽어서 꿈꾸어 기다릴 너를 생각하며
찢어진 가슴으로 네게 약속한다…
결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우리의 동지여
마침내 그날
우리 모두 해방 춤을 추게 될 그날
척박한 이 땅 마른 줄기에서 피어나는
눈물뿐인 이 나라의 꽃이 되어라…
엿새 전인 1월14일 새벽,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가 물고문으로 목숨을 잃은 박종철 씨를 추모하기 위해 서울대 언어학과 친구들이 지은 시의 일부다. 박씨는 서울대 언어학과 84학번. 그의 죽음은 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그로부터 22년의 세월이 흘렀다. 정권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그 사이 박씨의 죽음을 불러온 전두환 전 대통령과 그 정권을 이양받은 노태우 전 대통령은 구속됐다가 풀려났다. 또 최초의 사회주의 연방국가 소련이 무너졌고, 우리나라는 혹독한 경제위기를 겪었다. 정신적, 물질적으로 우리 사회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변했다. 그렇다면 그 기간 우리 국민의 이념과 의식은 어떻게 변했을까.
친구의 죽음 목도 학생운동에 적극 나서는 계기
박씨의 죽음에 누구보다도 큰 충격을 받았던 사람은 서울대 언어학과 84학번 동기들이다. 대부분 평범한 대학생이던 이들은 박씨의 죽음을 계기로 민주화 운동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처음부터 골수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친구의 죽음을 목도한 그들의 사회참여 의지와 고민은 남달랐다.
이제 그들은 40대 중반에 들어섰다.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심축에 해당하는 나이다. 그들의 이념이나 의식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을 터. 사람마다 변화의 방향과 정도가 다를 수밖에 없지만, 그들을 통해 우리 사회는 물론 국민의식의 변화를 짚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국장 겸 서울대 언어학과 동문회 총무를 맡고 있는 정덕환 씨에 따르면, 서울대 언어학과 84학번은 입학 당시 30명 정도였다. 이들 중 현재까지 연락이 가능한 사람은 20명 남짓. 재학 중 유학을 떠나거나 학교를 그만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교수, 공무원, 언론사 기자, 중소기업 대표, 자영업자, 직장인 등 이들의 현직은 다양하다.
이들 가운데 대학생 시절 박씨와 특히 인연이 깊었던 친구로 미국계 자동차부품업체 데이나코리아의 신상민 부장과 스크린골프업체 디온의 박명진 대표가 꼽힌다. 신 부장은 박씨의 뒤를 이어 과대표를 맡았고, 박 대표는 박씨와 비슷한 학내 언더서클 활동을 하면서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박씨의 평전에도 등장한다. 박씨가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기 전날 서울대 앞 녹두거리에서 함께 막걸리를 마신 친구가 신 부장이고, 같은 날 박씨가 성적표를 전해주기 위해 하숙집으로 찾아간 친구가 박 대표다.
대학생 시절 신 부장은 사상학습을 위한 언더서클 대신 연극회, 문학회 등 공개적인 동아리 활동만 했다. 하지만 그도 시대적 고민이 적지 않았다.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가 가장 컸죠. 제가 대학에 입학하기 1년 전인 83년까지만 해도 사복경찰이 학교 안을 휘젓고 다녔을 정도니까요. 친구들은 반미자주화 운동을 하면서 교련반대운동, 노동자 인권운동, 농활, 공장 위장취업을 통한 현장 활동 등을 많이 했어요. 저도 그런 운동에 일부 동참하면서 사회주의 국가들의 역사를 공부하고 우리 사회에 어떤 식으로 접목할 수 있을지 고민했죠.”
“말처럼 쉽지 않은 대의를 위한 희생”
그런 와중에 박씨의 사망 소식은 그를 포함한 친구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독재치하의 폭력적인 현실을 직접 겪으면서 위축되고 의기소침해진 친구들이 많았어요. 이전까지 학생운동에 심적으로만 동조하던 친구들이 적극 나서는 계기가 됐죠. 현실을 부정하던 이들도 친구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를 되새기면서 태도에 큰 변화를 보였어요.”
친구의 죽음과 1987년 6월 민주항쟁, 선후배들과의 끊임없는 술자리를 거치면서 신 부장에게는 신념이 생겼다. 정의, 자유, 평등, 통일 등 추상적이지만 옳다고 믿는 것들을 다 구현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잊지 않고 지향하면서 살아가야겠다는 신념.
학생운동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뒤 운동을 지속하기란 쉽지 않았다. 신 부장도 1988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운동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는 중소업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89년 학사장교로 입대했다. 제대 직후인 92년 자동차 관련 모 대기업에 취업하면서 그의 삶도 여느 직장인처럼 평범한 일상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
변화라면 대학생 시절 반미를 외치던 그가 미국계 자동차부품 회사로 자리를 옮긴 것. 한두 곳을 더 거쳐 4년 전 자리잡은 지금의 직장도 미국계 회사다. 그는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 욕망이 직장을 옮기게 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22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 그는 과연 자신의 신념을 얼마나 지켜가고 있을까.
1987년 1월20일 서울대에서 열린 故 박종철 씨 추모제에서 서울대 언어학과 동기 등 서울대생들이 영정을 앞세운 채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그는 요즘 자신의 정체성에도 혼란을 느낀다.
“80년대와 달리 요즘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이 많아졌어요. 인터넷을 통해 논의와 욕구가 다양해지면서 생긴 현상이죠. 문제는 이런 것들을 조정할 수 있는 원칙이라는 게 굉장히 빈약하다는 점이에요. 뭐가 옳은 것인지도 잘 모르겠고요. 예를 들어 용산 참사를 보더라도 진보세력,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사람 중에도 세입자들의 행동에 의문을 가진 이가 적지 않아요. 그만큼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화한 거죠.”
그렇다고 자신이 보수화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한 다음 날 새벽, 그는 봉하마을로 내려가 노 전 대통령이 뛰어내린 바위에 올라갔다.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용산 참사와 쌍용자동차 문제 등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불거진 사회문제들을 볼 때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많다.
“80년대보다 경제가 성장하고 열린 공간이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질적으로 발전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에요. 인식공격에 가까운 공개 비판이 난무하고, 돈을 최고로 치는 사회가 된 거잖아요.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진 게 아닌가 싶어요.”
박 대표는 훨씬 굴곡진 삶을 살았다.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에 주도적으로 가담한 박 대표에게 친구 박씨의 죽음은 지금도 가슴속 깊은 아픔으로 남아 있다.
“종철이와는 계보가 다른 서클에서 활동했지만 아주 가깝게 지냈어요. 종철이 사건이 터지고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여기저기 열심히 쫓아다녔죠. 정말 울분을 주체할 수 없었어요.”
박 대표는 언어학과 84학번 중 학생운동을 ‘전업’으로 삼았던 유일한 박씨의 친구다. 대학 2학년 때 집안 형편이 어려워 휴학한 박 대표는 다른 동기들에 비해 1년 늦은 89년에 졸업했다. 운동 전력 때문에 해병대에 징집된 그는 3개월 만에 제대했다. 평소 관절이 좋지 않았던 상태에서 무리한 훈련과 구타 등으로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아야 했던 것.
“편의주의적 행동, 가치관이나 정체성 여전히 혼란”
스크린골프 업체 디온의 박명진 대표는 대학생 때 박종철 씨와 함께 학생운동을 ‘전업’으로 삼았다.
선배와 함께 노래방 기계를 제작, 판매하는 사업을 벌여 반짝 재미를 봤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베트남 등 해외로 사업 진출을 시도하다 실패한 것.
그 다음에 뛰어든 사업은 ‘구띠에’라는 브랜드를 내건 커피 제조업이다. 이도 신통치 않아 3년 전부터는 실내골프장 사업을 하고 있다. 다행히 최근 실내골프장이 인기를 끌면서 국내외로의 사업 확장을 위해 무척 바빠진 상태다.
사업을 시작한 지 18년째. 대학생 시절 그가 꿈꾸던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먼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는 요즘 그가 지향하는 이념은 여전히 사회주의일까.
“근본 가치관에는 친사회주의적 성향이 아직 남아 있어요. 하지만 뚜렷하게 이념이 있다고 할 수 없을 만큼 희석된 상태죠. 그동안 어느 방향이 옳은 것인지 판단하지 못한 채 살아왔거든요.
사업을 하면서 자본주의 틀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게 됐어요. 그렇다고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지금도 가치관이나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한 채 살고 있으니까요.”
이어지는 박 대표의 이야기에선 보수화 경향이 읽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보면서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하고 싶은 말을 다하는 사람’이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더라고요. 솔직히 사업을 하다 보니 사회가 혼돈스러운 게 싫어요. 촛불집회를 보는 시각도 마찬가지예요. 이제 국가 정책에 대해 반응하거나 의사를 표현하는 체계를 수정해야 할, 딱 그럴 때가 아닌가 싶어요. 거친 시위와 죽창으로 정부에 대항하려 하면 국제사회에서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사회도 제대로 안 돌아가죠.”
그렇다고 친기업 정서에 젖어 있는 것도 아니다. 박 대표는 우리나라를 “재벌독과점 체제에 편입되거나 순응하지 않으면 죽는 사회”라고 평가한다. 글로벌한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대기업들의 독과점 체제가 더욱 강화돼 경제적 비(非)민주화가 심화되는 것이 가장 우려된다는 얘기다. 보수도 아닌, 그렇다고 진보도 아닌 이런 성향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박 대표는 이에 대해 “이념의 근본 뿌리는 변하지 않았지만 기업인으로 살다 보니 ‘편의주의적’으로 행동하고 사고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느낀다”고 털어놨다. 바로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80년대 학번들의 공통된 고민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