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산업계를 관심 있게 지켜본 사람은 하나같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한국을 버릴 것 같다는 얘기를 한다. 삼성전자는 경기 용인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데도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 생산시설 규모를 2배로 늘렸다. SK하이닉스는 용인 반도체 공장 건설을 6년째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면서 미국 인디애나주에 고대역폭메모리(HBM) 관련 공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앞뒤가 안 맞다. 결정적으로 두 기업 모두 한국에서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겠다고 공언한 적이 없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가 5월 1일 주간동아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한국 정치권의 ‘RE100’(기업 활동에 필요한 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해야 한다는 글로벌 캠페인) 대응이 늦어지는 가운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재생에너지 수급이 어려운 한국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박 교수는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기사에서 한국이 오랫동안 고수해온 제조업, 대기업 중심 경제 성장모델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이상윤]
“삼성전자·SK하이닉스 한국 버릴 것 같다”
FT 기사에서 한국의 기존 성장모델이 2011년 정점에 달했다고 분석했는데.“많은 지표를 통해 확인되는 사실이다. 제조업 성장률·수익률은 2010년까지 한국 경제 평균을 웃돌았다. 그러다 2011년 평균과 같아졌고, 제조업 경쟁력을 나타내는 무역특화지수도 같은 해를 기점으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또 이 무렵 중국이 부상했다. 한국 주력 분야이던 저가, 범용재가 중국에 따라잡히면서 산업 진화의 단절이 시작됐다.”
재벌 3세들에게서 이런 문제를 타개할 리더십이 안 보인다고도 했다.
“고부가가치, 특수재 분야에 진출하려면 기술 혁신이 필요한데, 이때 새로운 기술은 주로 도전 기업에서 탄생한다. 기존 기업에서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기존 기업의 경우 기득권을 잃을 수 있다는 기회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내부에서 혁신 아이디어가 나와도 의사결정에서 왜곡이 발생한다.
2011년 핀란드에서 노키아 관계자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알고 보면 스마트폰에서 중요한 혁신은 애플 이전에 노키아에서 먼저 다 나왔다. 사내 스타트업이 MP3플레이어·카메라 탑재, 터치스크린 적용, 애플리케이션(앱) 스토어 구축 등 아이디어를 모두 제시했다. 그런데 왜 안 했느냐. 경영진이 ‘터치스크린은 비싸서 못 넣는다’ ‘스마트폰은 소수 하이엔드 시장에서만 팔릴 것이기 때문에 기존 저가폰에 주력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현재 한국 재벌 3세들도 과거 방식을 답습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고 본다. 얼마 전 삼성이 주 6일 근무를 발표한 것만 봐도 아직 사고방식이 1970~1980년대 중화학공업 시대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다.”
“RE100 대응 의지 의문시되는 정치권”
산업 전체로 봤을 때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는 뭔가.“RE100 대비다. 혁신이 없는 가운데 제조업을 중심으로 선진국의 RE100 압박이 커지고 있다. 당장 6년 뒤인 2030년부터 기업의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을 60%로 끌어올려야 한다. 한국은 현재 그 비율이 10%도 안 된다. 그럼에도 아직 RE100 관련 논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도 반도체 생산시설을 짓겠다고만 하지 RE100 요구 조건에 맞춰 재생에너지를 어떻게 조달할지에 관해선 아무런 얘기가 없다. ‘RE100 산업 클러스터’를 구축해 반도체, 자동차, 이차전지 등 주요 기업이 필요한 재생에너지를 적절히 공급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제조업, 대기업 중심 경제 성장모델을 해체해야 한다는 기존 입장과 배치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RE100에 부합하게 산업 환경을 재편하는 동시에 출자 구조를 규제해 대기업에 과도하게 집중된 경쟁력을 억제시키면 된다. 문제 근본은 독과점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의 경우 지금은 현대차와 기아 아래 모든 부품·소재 계열사, 하청업체가 한 줄로 줄 세우기 돼 있다. 이런 상황에선 어떤 혁신도 일어날 수 없다. 재벌들이 3%도 안 되는 지분으로 150개씩 계열사를 거느리는 구조에서 벗어나 사업에 선택과 집중을 하도록 유도하고, 그 아래에서 다양한 경쟁과 혁신이 일어나게끔 하자는 것이다. 그래야 미국처럼 포드나 제너럴모터스(GM)가 있어도 전기차 분야에서 테슬라 같은 신흥 기업이 등장하고, 중국처럼 100개 넘는 전기차 기업이 치열한 경쟁을 벌일 수 있다.”
정부는 친원전 정책을 펴고 있다. RE100에 잘 대응할 수 있을까.
“여러모로 비관적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최근 윤석열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RE100 얘기를 꺼내긴 했다. 하지만 구체적 내용은 없었다. 대통령은 거의 맹목적인 원전주의자가 돼버렸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RE100이 본격화하고 선진국에서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을 맞추라는 요구가 거세지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한국을 떠날 것이다. 정치권에서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룰 의지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냥 조용히 있다가 가버리려는 것이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내수용으로 쓰면 그만 아닌가. 그럼 국내엔 안 그래도 중국에 밀리는 후진 산업만 남게 된다. 일자리가 사라지고 공동화가 발생할 것이다. 이때 해외에서 수익을 올리는 기업들의 대내 영향력은 지금보다 커질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의 RE100 대응 상황은 어떤가.
“미국은 반도체 생산시설을 RE100에 맞춰서 짓고 있다. 대만 TSMC는 2030년까지 대만 현지 공장의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을 60%까지 높이겠다고 선언했다. 말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 태양광, 해상풍력 20~30년 장기 구매 계약을 맺었다. 대만 국민에게도 첨단 반도체를 대만에서 생산하겠다고 약속한 상태다. 한국이 이런 중대 문제에 손 놓고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게 답답하다.”
22대 국회에서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
“RE100에 선제 대응해 해외 반도체 기업들로 하여금 오히려 국내에 공장을 짓게 하자거나, 이를 통해 일본에 구축되고 있는 아시아 반도체 거점을 한국으로 옮겨오자는 식의 건설적인 논의가 이뤄지면 좋겠다. 다만 RE100처럼 국민에게 만족할 만한 답을 제시하기 어려운 문제를 끄집어낼 정치 지도자가 있는지 의문이다. 여소야대 정국 속 어려운 문제는 다 덮고 ‘전 국민에게 25만 원을 지급하겠다’ ‘특검으로 내 딸처럼 탈탈 털겠다’는 얘기만 한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이유는 멀리 빙하가 보일 때부터 뱃머리를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기가 닥치고 나서 방향타를 돌리면 그땐 이미 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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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 기자
island@donga.com
안녕하세요. 주간동아 이슬아 기자입니다. 국내외 증시 및 산업 동향을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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