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 [지호영 기자]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는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이 한국에는 오히려 득이 될 수 있다”며 “미국의 대중 제재로 중국 반도체 기술의 성장이 지연될 때 차세대 기술력에서 우위에 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화학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첨단소재연구본부에서 책임연구원을 지냈으며 반도체 신소재와 차세대 반도체 분야에 관한 다수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최근 권 교수는 글로벌 반도체산업 재편을 다룬 ‘반도체 삼국지’를 출간했다.
미국 거대한 망으로 중국 포위
미국은 왜 중국 반도체산업을 죽이려 하나.“2000년대 중국 후진타오 정권은 반도체 굴기를 계획했고 이를 미국이 승인했다. 이후 중국 반도체 기업들은 정부의 든든한 지원을 받아 급성장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성장 속도에 미국이 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시진핑 정권이 들어서면서 ‘중국은 미국 버금가는 선진국이 되겠다’고 하니 대중 제재가 본격화됐다.”
미국의 대중 제재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나.
“미국은 정밀하게 계획된 프로세스에 따라 하나씩 시행하고 있다. 제재 정책 하나를 시행한 뒤 중국 반응을 보고 다음 정책에 들어간다. 처음에는 EUV(극자외선) 노광 장비 수출을 통제했고, 최근에는 18㎚ 이하 D램과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등을 생산하는 중국 기업에 미국 반도체 장비 수출을 금지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미국은 반도체 패권을 잡기 위해 중국을 기술적으로나 산업적으로나 포위할 수 있는 거대한 망을 만들고 있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 제재 프로세스는 어느 단계까지 왔나.
“시작 단계의 마무리 정도다. 이미 네덜란드 EUV 장비업체 ASML은 중국 현지에서 모든 엔지니어를 철수시켰다. 미국 정부의 입김이 그 수준까지 가고 있다.”
미국 측 제재에 중국 반응은 어떤가.
“중국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없어도 산업이 잘 돌아가도록 반도체 장비 자급자족을 구축하고 있다. 다만 중국 반도체 장비 기술은 아직 글로벌 수준에 못 미치고 있다. 또한 글로벌 반도체 향방과 상관없이 자체 반도체를 만들어 중국만의 길을 가는 전략도 취하고 있다. 하지만 ‘메이드 인 차이나’ 반도체가 글로벌 제품과 호환이 안 되면 중국은 반도체 시장에서 점점 고립되면서 갈라파고스가 될 수 있다.”
글로벌 반도체업계에도 타격이 큰데.
“당장은 손해가 크지만 시간이 지나면 손해가 아닐 수 있다. 반도체 장비는 감가상각률이 굉장히 높아 새 장비도 6개월 후에는 반값이 된다. 시간이 지난 장비는 돈이 되지 않는다. 단,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제조 부분이 중국에 들어가 있어 ASML처럼 적극적인 출구 전략보다 소극적인 출구 전략을 취하는 것이 현명해 보인다. 적극적인 출구 전략은 모든 지원을 철수하는 것인 반면, 소극적인 출구 전략은 자연스럽게 감가상각이 되도록 놔두는 것이다. ‘중국에 투자하고 싶지만 정부 정책상 추가 투자는 안 된다’는 식으로 핑계를 대면서 소극적으로 빠져나오는 방법이다. 굳이 중국을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한국 반도체업체들의 대중 수출 의존도는 어느 정도인가.
“삼성전자는 한 자릿수이고, SK하이닉스는 13~15%다. SK하이닉스는 미·중 갈등이 없었다면 중국에 더 많이 투자했을 것이다. 그 전에 중국 시장에서 발을 빼 다행이다.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뿐 아니라, 다수의 중소 반도체 기업도 중국에 생산지를 두고 있다. 미국의 칩4 동맹이 본격화되면 중국 시장을 상실해 단기적으로 손실이 커질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득이 될 수도 있다.”
중국 시장 판로가 막히는데, 득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중국 정부는 글로벌 반도체업체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자 반도체 기술 굴기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대중 제재로 중국이 기술적으로 한국을 쫓아올 수 있는 모멘텀이 약화됐다. 중국이 한국을 따라잡을 시점이 뒤로 미뤄진 것이다. 이 부분이 득이다. 다만 이는 시한폭탄을 뒤로 미루는 것과 같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언제든 미·중 관계가 복원되거나 새로운 혁신 기술이 나온다면 그 시차는 다시 좁혀질 수 있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 수익 구조 개선해야
현재 한국과 중국의 기술 격차는 어느 정도인가.“3D 낸드플래시만 보면 중국 메모리 반도체 생산업체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와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기술 격차는 5년 전만 해도 3~5년 났다. 그 격차가 6개월~1년 정도로 좁혀지던 상황이다.”
10월 24일 대만 TSMC는 중국 인공지능(AI) 반도체 스타트업 ‘비런테크놀로지’의 실리콘 위탁생산을 중단하기로 했다. 점점 미국의 대중 제재가 약발이 먹히는 분위기인데.
“한국과 대만 기술의 근원을 추적하면 대부분 미국 IP(Intellectual Property·설계자산)에서 창출됐다.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그 IP를 막아 한국과 대만을 제재할 수 있다. 한국과 대만 입장에서는 미국 정책에 따를 수밖에 없다. 물론 미국은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기술이 대체할 수 없는 수준이라 그런 악수를 두진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미국은 칩4 동맹을 통해 중국을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확실히 떼어놓으려 한다. 한국도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 제재에 대비해 전문가들이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재편되는 상황에서 한국이 밀려나지 않으려면 차세대 기술에서 우위에 서야 한다.”
과연 차세대 반도체 기술은 어디서 나올까.
“반도체 공정마다 현 수준을 뛰어넘는 기술이 나오면 그것이 차세대 기술이 된다. 공정 이외의 차세대 반도체 기술을 살펴보면 최근 큰 화두는 양자컴퓨터다. 양자컴퓨터는 당장 반도체와 상관없어 보이지만, 결국에는 IT(정보기술) 기업이 대부분 양자컴퓨터로 방향을 잡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현재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수익이다. 현재는 대부분 미국이나 유럽 기업이 칩을 설계하고 한국은 제조한다. 한국이 돈을 많이 버는 것 같지만, 반도체 장비 비용이 커서 수익이 많지 않다. 국내 반도체 기업은 해외 반도체 장비 의존도가 90%를 넘는다. 따라서 반도체 장비나 소재, 부품의 국산화가 절실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초과학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한국 정부 간섭 삼가야
파운드리 시장점유율에서 삼성전자가 선두 TSMC와 격차가 벌어져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삼성전자는 종합 반도체 기업이다 보니 파운드리만 하는 TSMC와 격차가 날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의 목표는 당장 TSMC의 시장점유율을 따라 잡는 것이 아니라, 기술력에서 TSMC에 밀리지 않는 것이다. 이는 메모리 반도체에서 삼성전자가 일본 업체들을 따라잡았던 전략이다. 이를 위해 삼성전자는 TSMC보다 반 발짝 앞서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이 전략이 파운드리 시장에서도 통할 것으로 보나.
“삼성전자가 세계적인 일본 반도체 기업들을 무너뜨리는 데 1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삼성전자는 당장 TSMC를 따라잡아 시장점유율을 20~30%까지 올릴 수 있겠지만, 출혈 경쟁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점유율을 높인다고 해서 TSMC에 충성하던 팹리스(설계·개발) 기업들이 삼성전자로 돌아서지도 않는다. TSMC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기술력이 필요하다. 삼성전자가 기술력을 앞세워 압도적인 성능의 칩을 만들면 자연스럽게 삼성전자 위주의 파운드리 생태계가 형성되기 시작할 것이다. 팹리스 기업들의 TSMC에 대한 충성심에도 균열이 생길 수 있다. 그렇다면 한순간에 파운드리 시장점유율이 치고 올라갈 가능성도 크다.”
대표적인 파운드리 기술력은 무엇인가.
“파운드리의 핵심 기술은 웨이퍼 위에 얼마나 많은 트랜지스터를 집적할 수 있느냐(전공정)다. 같은 면적에 더 많은 칩을 집적하기 위해서는 패턴을 정밀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패턴을 10㎚ 이하로 만들 수 있는 기술은 삼성전자와 TSMC밖에 없다. 또한 성능 좋은 칩을 불량품 적게 대량으로 만드는 것이 파운드리 기술력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출간한 ‘반도체 삼국지’에서 한국이 일본 전철을 밟는 것을 경계했는데.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일본 반도체 기술력은 세계 최고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기술에만 너무 집중했다. 원래 잘했던 기술을 제쳐두고 새로운 기술에 뛰어들어 모험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 성장동력을 잃었다. 또한 일본 정부의 과도한 간섭도 일본 반도체산업 위기에 일조했다. 일본 정부는 반도체 시장을 키우기 위해 도시바, 미쓰비시 등 반도체 기업들을 강제적으로 구조조정했다. 이 과정에서 비용이 증가했고 효율은 감소됐다. 일본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은 훗날 미·일 반도체 협정에서 일본 반도체업체 보조금, 담합 등의 빌미가 돼 일본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한국 정부는 일본의 이런 전례를 교훈 삼아야 한다. 정부가 반도체 시장에서 존재감을 많이 드러내는 것을 삼가야 한다.”
한국 정부는 어떤 방식으로 반도체산업을 지원해야 하나.
“미래 혁신이 될 기초과학에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한국은 기초과학 연구가 현저히 부족하다. 또한 정부는 반도체 중소기업들을 위해 관련 장비를 지원할 필요가 있다. 국내 반도체 중소기업들은 EUV 장비가 대세가 될 것을 알고 EUV용 마스크나 장갑 등을 개발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제품들을 테스트할 EUV 장비가 없다. 5000억 원이나 하는 EUV 장비를 살 수 있는 중소기업이 있겠는가. 정부가 대신 EUV 장비를 구입해 오픈 플랫폼으로 만드는 등 지원이 필요하다.”
내년에 반도체 시장이 침체 사이클로 접어들면 올해보다 더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된다. 반도체산업은 언제쯤 살아날까.
“코로나19가 종식되면서 개인용 컴퓨터(PC), 스마트폰, 암호화폐 채굴용 그래픽 처리장치(GPU), 데이터센터 수요 등이 감소해 반도체 사이클이 하강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또한 미·중 갈등에 따른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으로 비용이 상승하고 제품 가격도 올라갔다. 이런 영향으로 내년까지 하강 국면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제품 교체 주기가 오면 시장은 다시 커질 테고, 결국 반도체 사이클은 장기적으로 우상향한다.”
한여진 기자
119hotdog@donga.com
안녕하세요. 한여진 기자입니다. 주식 및 암호화폐 시장, 국내외 주요 기업 이슈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영상] “AI 혁명 이후 양자컴퓨터가 혁신 주도할 것”
‘오너 3세’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 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