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프롬, 최소 10년 회복 어려워
러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CGTN]
가스 판매량 급감이 실적 부진의 핵심 요인이었다. 지난해 가스프롬 매출은 전년 대비 30% 감소한 8조5000억 루블(약 131조6600억 원)에 그쳤다. 이 중 가스 판매 매출이 8조4000억 루블(약 130조1100억 원)에서 4조1000억 루블(약 63조5000억 원)로 반토막 나며 실적 부진을 유발했다. 특히 러시아 이외 지역에서 가스 판매 수익이 2022년 7조3000억 루블(약 113조700억 원)에서 지난해 2조9000억 루블(약 44조9200억 원)로 급감했다. 러시아 에너지 전문가들은 “한때 유럽 에너지 공급에서 강력한 지배력을 지녔던 가스프롬이 유럽시장 상실로 엄청난 손해를 보고 있다”고 분석했다. 우크라이나 침공 전 러시아의 10년간 연평균 가스 수출량은 2300억㎥였지만 지난해는 220억㎥에 불과했다.
가스프롬이 향후 10년간 손실을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러시아 금융기관이 가스프롬 경영진의 의뢰를 받아 작성한 미공개 보고서를 인용해 “2035년까지 가스프롬의 유럽 수출 규모는 전쟁 전 수준의 3분의 1인 연간 500억~750억㎥에 불과할 것”이라며 “가스프롬이 입은 손실은 적어도 향후 10년간 회복되기 어려울 전망”이라고 밝혔다. 이 보고서는 “가스프롬의 손실 감소분은 2035년까지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코로나19 사태가 벌어지기 전인 2020년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기 힘들다”고 분석했다. 엘리나 리바코바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가스프롬은 물론, 러시아 정부도 미래가 암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 경제를 지탱해온 가스 등 에너지 산업에서조차 수입이 줄어들고 오히려 적자까지 난다면 사실상 러시아 경제가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
가스프롬이 위기에 직면한 것은 대중(對中) 수출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아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 제재로 유럽에 가스를 제대로 수출하지 못했다. 실제로 유럽 가스 수입 시장에서 러시아의 점유율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인 2021년 40%에서 2023년 8%로 크게 줄었다.
러시아가 독일 등 유럽에 가스를 공급하기 위해 건설했던 ‘노르트스트림-1·2’ 가스관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사용이 중단된 상태다. 이 가스관은 러시아에서 발트해 해저를 거쳐 독일까지 이어져 있다. 노르트스트림-1 가스관은 2011년 완공돼 연간 550억㎥ 규모의 천연가스를 공급해왔다. 노르트스트림-2 가스관은 2021년 완공됐지만 승인 절차가 중단됐고, 2022년 9월 가스관 일부가 폭발해 아예 폐쇄됐다.
게다가 우크라이나는 유럽으로 공급되는 러시아산 천연가스의 경유 운송 서비스를 내년부터 제공하지 않을 계획이다. 우크라이나 경유 가스관은 전쟁 중인 지금도 러시아산 천연가스가 중서부 유럽으로 수출되는 주요 통로로 이용돼왔다.
러시아는 그동안 ‘시베리아 힘-2(POS-2)’ 가스관 건설 프로젝트를 적극 추진했다. POS-2는 러시아 시베리아 알타이 지역에서 몽골과 신장웨이우얼(위구르)자치구를 거쳐 중국 서부 지역으로 연결되는 총길이 2600㎞의 가스관이다. 러시아는 이 프로젝트가 성사되면 중국에 매년 500억㎥의 가스를 30년간 보낼 계획이다. POS-2 가스관의 수송량은 노르트스트림 가스관과 비슷하기에 러시아로선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 수출길이 끊긴 자국의 가스 산업에 숨통이 트일 것으로 기대했다. 러시아는 수년 전부터 중국에 올해부터 이 가스관 건설을 시작하자고 제안해왔다.
뜨뜻미지근한 중국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5월 16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크렘린궁 제공]
‘가스 동맹’이라는 말까지 들었던 양국이 POS-2 가스관 프로젝트에 불협화음을 보이는 이유는 가스 가격과 물량에 대한 이견 때문이다. FT는 “러시아가 중국과 POS-2 가스관 계약 을 시도했지만 가격 및 공급 수준에서 중국의 ‘불합리한 요구’로 좌초됐다”고 보도했다. 중국은 러시아 현지 수준과 비슷한 가격으로 가스 공급을 요구했고, 연 500억㎥ 수송 용량 중 일부만 구매하겠다는 입장이다.
중국은 이미 다른 국가들보다 낮은 가격에 러시아산 가스를 쓰고 있다. 미국 컬럼비아대 글로벌에너지정책센터(CGEP)에 따르면 중국은 100만BTU당 미얀마에는 10달러(약 1만3700원), 우즈베키스탄에는 5달러(약 6850원)를 지불하지만 러시아에는 4.4달러(약 6028원)를 내고 있다. 중국은 자국이 유일한 생명줄이라는 점을 악용해 러시아에 가스 가격을 더욱 낮추라고 압박하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전 유럽에 100만BTU당 평균 10달러에 가스를 수출한 바 있다.
중국이 러시아와 가스관 협상에서 이 같은 요구를 하는 것은 러시아보다 우월한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로선 가스 수출이 절박하지만 중국은 느긋하다. 독일 베를린에 있는 카네기 러시아 유라시아 센터의 알렉산더 기부에프 소장은 “중국은 시간이 자기편이라 믿고 있고 러시아로부터 최상의 조건을 끌어낼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있다”며 “러시아가 이번 거래에 실패한 것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양국 관계에서 중국이 상위 파트너가 됐다는 것을 뜻한다”고 지적했다. 기부에푸 소장은 또한 “가스전은 이미 개발됐고, 궁극적으로 러시아는 이 가스를 판매할 다른 선택권이 없다”면서 “러시아에 가스 수출을 위한 대체 육로가 없다는 점은 중국 측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러시아로서는 중국 이외 다른 국가들에 가스를 판매할 방안이 없다”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다른 방법, 예를 들어 연료를 영하 160도까지 냉각할 수 있는 플랜트와 액화천연가스(LNG)를 운송하는 데 필요한 특수 유조선 등도 사실상 없는 실정이다. 전쟁 자금이 절실한 러시아로서는 그야말로 사면초가 신세다.
되돌아온 러시아의 ‘에너지 무기화’
중국이 여유를 부리는 또 다른 이유는 자국에 필요한 가스를 이미 충분히 확보했기 때문이다. CGEP는 지난해 1700㎥였던 중국의 수입 가스 수요가 2030년 2500㎥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면서 기존 계약으로 대부분 충족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은 영향력 확대를 위해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가스 거래에 적극 나서고 있다. 중국이 POS-2 가스관을 통해 가스를 조금만 수입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물론 중국은 러시아를 통해 가스를 공급받는 것이 필요하다. 기부에프 소장은 “중국은 대만 등과 남중국해 분쟁이 발생할 경우 해상 경로가 아닌 육로로 이송되는 안전한 에너지 공급원으로서 러시아 가스가 전략적으로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그럼에도 중국은 가스 수입을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 가스 수입을 러시아에 지나치게 의존할 경우 자칫 휘둘릴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과거 여러 차례 가스관 밸브를 막는 등 유럽을 상대로 ‘에너지 무기화’라는 칼을 휘둘렀다. 미국 제재 역시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외교 전문지 ‘더디플로맷’은 “베이징은 모스크바와의 계약서에 서명하는 순간 미·중 관계가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방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 밀월관계를 유지해온 양국이 동상이몽을 보이는 모습에서 국제관계에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으며 오로지 국익만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