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오른쪽)와 고(故) 세예드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 [이란 최고지도자실 제공]
차기 라흐바르 후보였던 라이시
이란 초대 라흐바르는 ‘국부’로 불려온 호메이니다. 호메이니는 자신이 주도한 이슬람 혁명과 신정체제를 수호하고자 정규군과는 별도로 혁명수비대를 만들었다. 혁명수비대는 육해공군과 정보 및 특수부대, 미사일부대 등을 보유한 정예군 조직이다. 이란의 두 번째 라흐바르는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다. 호메이니가 사망하자 후계자인 하메네이가 1989년부터 지금까지 35년째 최고지도자인 라흐바르를 지내며 이란을 통치하고 있다.하메네이는 1934년생으로 고령인 데다, 전립선암을 앓은 적이 있는 등 건강이 좋은 편이 아니다. 그는 어린 시절 신학교에서 공부했고, 1958년 이슬람 시아파 성지 중 하나인 콤에서 호메이니의 제자로 가르침을 받았다. 하메네이는 1960년대부터 팔레비 왕조를 타도하기 위한 운동에 뛰어들었고, 이슬람 혁명 이후 국방차관과 혁명수비대 사령관 등 요직을 거쳤다. 1981년 마무드 알리 라자이 당시 대통령이 폭탄 테러로 사망하면서 치르게 된 대통령 보궐선거에서 하메네이가 당선했고, 그는 1989년까지 3·4대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이후 호메이니가 사망하자 라흐바르로 선출됐다.
하메네이는 80세가 넘어서면서 후계자를 놓고 자신의 아들 모즈타바 하메네이와 당시 사법부 수장이던 세예드 에브라힘 라이시를 저울질해왔다. 그러다 라이시가 2021년 대통령에 당선한 이후 자신이 사망할 경우 라이시에게 권력을 넘겨주기로 마음먹었다.
라이시 대통령은 신정체제 수호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강경파다. 10대 때 하메네이로부터 신학을 배웠고, 1970년대 팔레비 왕조 타도 운동에 참여했다. 라이시 대통령은 이슬람 혁명 2년 뒤인 1981년 수도 테헤란 인근 카라즈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1985년 테헤란 검찰청 차장검사가 된 그는 1988년 당시 라흐바르인 호메이니의 지시로 반체제 인사 숙청을 이끌었다. 당시 5000여 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는 ‘테헤란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라이시 대통령은 2009년 대통령 부정선거 의혹에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인 ‘녹색 운동’에 대한 유혈 진압에도 앞장선 바 있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 반미·반이스라엘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특히 2022년 의문사한 마흐사 아미니 사건으로 전국에서 ‘히잡 반대 시위’가 확산하자 군경에 시위대 발포를 명령하기도 했다. 라이시 대통령은 성직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라흐바르 사망 또는 유고 시 후임을 결정하는 국가지도자운영회의 부의장도 맡았다. 헌법 기관인 국가지도자운영회의는 직선제로 선출한 고위 이슬람 성직자 88명으로 구성된 조직이다. 하메네이는 풍부한 국정 경험과 신정체제 수호 신념으로 뭉친 라이시 대통령을 후계자로 간주해왔다.
하지만 라이시 대통령은 5월 19일 이란 동아제르바이잔주 바르즈건 지역에서 열린 댐 준공식 참석을 마지막으로 사망했다. 탑승한 헬기가 디즈마르 산악 지대에서 악천후와 기체 이상으로 추락한 것이다. 라이시 대통령이 불의의 사고로 숨지면서 하메네이는 후계자 선정 작업을 처음부터 다시 할 수밖에 없게 됐다.
라이시 대통령(왼쪽)이 사고 당일인 5월 19일 헬기에 탑승해 앉아 있다. [IRNN 캡처]
“초안을 다시 그리는 형국”
라이시 대통령의 후임을 선출할 보궐선거가 6월 28일 실시되지만 현재로선 강경파가 당선할 것이 분명하다. 서방 언론들은 보궐선거에서 하메네이의 통치 자금을 관리해온 모하마드 모크베르 대통령 직무대행과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국회의장, 알리 라리자니 전 국회의장 등이 경쟁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들은 모두 이란 내 강경파다. 문제는 이들 가운데 누가 대통령으로 당선하든 하메네이의 후계자가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서방 언론들은 대통령 보궐선거를 분기점으로 차기 라흐바르 자리를 놓고 권력 다툼이 벌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글로벌 싱크탱크 국제위기그룹(ICG)의 알리 바에즈 이란 담당 연구원은 “하메네이가 신정체제의 불확실성을 줄이려고 라이시를 최고지도자의 후계자로 키우다가 갑자기 모든 계획이 어그러져 초안을 다시 그리는 형국”이라고 지적했다. 가브리엘 노로냐 전 미국 국무부 이란 담당관은 “이란 권력의 핵심은 차기 대통령이 아니라 차기 라흐바르가 누가 될 것이냐의 문제”라고 내다봤다.
서방 언론들은 하메네이가 애초 후계자로 염두에 뒀던 아들 모즈타바를 내심 차기 대통령으로 고려하고 있을 가능성도 내다보고 있다. 하메네이의 자녀 6남매 가운데 둘째 아들이자 성직자인 모즈타바는 현재 콤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55세인 그는 혁명수비대에 들어가 1987년부터 1988년까지 이란-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다. 당시 경험으로 혁명수비대 최고위급 장성들과 친분을 쌓았고. 이후 콤에서 이란 고위 성직자들로부터 신학을 배우면서 이들과도 강한 유대를 맺었다. 그는 2000년대 초 최고지도자실에서 일하며 아버지를 대신해 ‘그림자 실세’로 활동했다. 특히 2005년 대선에서 혁명수비대 출신인 마흐무드 아마디네자드가 당선되는 데 물밑에서 기여했다. 그는 2009년 대선 때도 아마디네자드의 재선을 위해 상당한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개혁파 지도자 미르호세인 무사비가 모즈타바의 역할을 의심하며 강력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영국 언론 ‘이란 인터내셔널’은 지난해 3월 유출된 이란 혁명수비대 문건을 분석한 내용을 토대로 “모즈타바가 혁명수비대 산하 바시즈 민병대의 사실상 지도자며, 혁명수비대 내부 정보기관의 막대한 임면권을 가지고 있다”면서 “모즈타바가 반체제 시위를 폭력 진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도했다. 모즈타바는 이란 정부에서 아무런 공식 직위를 맡지 않았는데도 4월 하메네이가 연설할 때 오른편에 앉아 있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그동안 라이시 대통령이 하메네이 후계자로 낙점됐던 만큼 모즈타바는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라이시 대통령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면서 그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독일 베를린에 본부를 둔 싱크탱크 중동과 세계질서 센터의 알리 파톨라 네자드 소장은 “하메네이는 오랫동안 아들 모즈타바를 후계자로 삼고 싶어 했다”며 “모즈타바는 ‘그늘에 가려진 주연 배우’였다”고 지적했다. 네자드 소장은 “라이시 대통령의 사망으로 하메네이의 후계 구도가 재편됐다”며 “결과적으로 모즈타바가 다시 관심을 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수잰 멜로니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부소장도 “라이시 대통령의 죽음은 후계 승계 과정에 변화를 몰고 왔다”면서 “모즈타바는 막후에서 상당한 권력을 행사한 인물”이라고 지적했다.
민주주의 열망 커지는 이란
문제는 모즈타바가 후계자가 될 경우 세습 논란이 증폭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라흐바르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는 권력 세습은 이란공화국을 세운 1979년 이슬람 혁명 정신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이슬람 혁명은 팔레비 왕조를 축출하면서 세습통치를 종식했다는 의미가 있는데, 권력을 세습한다면 왕정체제와 다름없게 된다. 하메네이가 왕위를 물려주듯이 아들에게 권력을 세습할 경우 팔레비 왕조의 통치를 불법 군주제라고 비난했던 호메네이의 철학에도 어긋난다. 중동 전문 언론매체 ‘암와즈’의 모하마드 알리 샤바니 분석가는 “최고지도자가 세습된다는 것은 그 체제가 죽었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혁명수비대를 비롯한 군부와 정보기관 등은 모즈타바를 후계자로 지지하고, 성직자 상당수도 찬성 입장을 보이고 있다.반면 이란 국민은 대부분 권력 세습에 반대하고 있다. 지금 이란 국민은 물가 폭등과 실업 대란, 휘발유 부족 사태를 겪고 있다.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불만이 커지면서 갈수록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 등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이다. 네자드 소장은 “2022년 반정부 시위로 혼란을 겪었고 서방 제재로 이란의 경제위기가 심화한 상황에서 최고지도자가 아들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멜로니 부소장도 “모즈타바가 라흐바르의 후계자로 지명될 경우 세습통치 논란은 불가피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각에선 혁명수비대가 모즈타바를 후계자로 내세우며 권력을 장악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 맥락에서 볼 때 이란 신정체제는 바뀔 수도, 붕괴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