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사회·문화·교육 분야 대정부질의에 출석하던 이완구 국무총리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정치(政治)란 무엇입니까.”
“식량을 풍족하게 하고(足食), 군대를 충분히 하고(足兵), 백성의 믿음을 얻는 일이다(民信).”
자공이 다시 물었다.
“어쩔 수 없이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군대를 포기해야 한다.”
“나머지 두 가지 가운데 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합니까.”
“식량을 포기해야 한다. 예부터 모든 사람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백성의 믿음 없이는 (나라가) 서지 못하는 법이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논어’ 안연편(顔淵篇)에서 비롯된 ‘무신불립’(無信不立)의 유래다.
믿음의 기본은 사람의 말
4월 20일 스스로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날 뜻을 밝힌 이완구 총리는 현대판 무신불립의 대표적 사례로 꼽을 만하다. 이 총리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고(故)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과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목숨’까지 운운하며 항변했지만 거듭된 거짓 해명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는 데 실패하고 총리직에서 물러날 뜻을 밝혀야 했다.
믿음(信)의 기본은 사람(人)의 말(言)이다. 그런데 이 총리는 자신의 말로 스스로 믿음을 잃었다. ‘이완구’ 이름 석 자가 적힌 성 전 회장의 메모가 공개된 뒤 이 총리는 줄곧 성 전 회장과의 관계를 부인하는 데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대정부질문에서 성 전 회장과의 관계에 대해 의원들로부터 거듭 질문을 받고 이 총리는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가 아니다”라고 답했지만 그의 말은 2013년부터 20개월간 23차례 만난 것으로 기록된 성 전 회장의 일정표가 공개되면서 무력화됐다. “도와달라고 받은 전화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그의 얘기는 2013년 4월 이후 이 총리와 성 전 회장 사이에 217차례에 걸쳐 통화 착·발신이 이뤄졌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헛소리로 판명이 났다.
특히 2013년 4월 재·보궐선거 당시 성 전 회장과 독대 의혹이 제기되자 “독대하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곧이어 성 전 회장 운전기사는 물론, 이 총리의 전 운전기사, 심지어 당시 현장에 있던 지역 언론인 등의 목격담이 이어졌다. 결국 이 총리는 “독대하지 않았다”에서 “기억이 잘 안 난다”로 말을 바꿨다. 금품수수설에 대해서는 “돈 받은 증거가 나오면 목숨을 내놓겠다”고 강변했지만, 음료수 박스를 통해 3000만 원이 전달됐다는 구체적 정황이 담긴 보도가 나와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성완종 리스트가 공개된 뒤 열흘 남짓 이 총리가 해명하려고 내뱉은 말들이 연거푸 거짓으로 밝혀지면서 그의 말은 신뢰를 잃었고, 나중에는 ‘(이 총리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믿기 어렵겠다’는 기류가 형성돼 결국 사의 표명으로 이어졌다.
이종훈 시사평론가는 “이 총리가 애초 성 전 회장과 ‘개인적 친분이 없다’고 얘기한 것에서부터 비극이 시작됐다”며 “객관적으로 가까운 사이였다는 증거가 연달아 나오면서 ‘친분이 없다’는 처음의 거짓을 합리화하기 위해 더 큰 거짓 해명을 하다 결국 사의에 이르게 됐다”고 분석했다.
거짓말, 불법, 탈법은 이기는 수단일 뿐
그렇다면 이 총리는 왜 거짓 해명으로 스스로 신뢰를 무너뜨린 것일까. 한 심리학자는 “이완구 총리에게는 정치생명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자신에게 해가 되는 불리한 얘기를 하지 않으려 거짓 해명으로 일관했을 수 있다”고 풀이했다. 그는 “이 총리 역시 공인이자 정치인이기 이전에 자신에게 불리한 것을 회피하려는 본성을 가진 하나의 불완전한 사람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성완종 리스트가 공개된 후 이 총리가 사의를 표명하기 전까지 열흘 동안 스포트라이트는 온통 이 총리에게 집중됐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수많은 언론으로부터 ‘진실성’ 검증을 받았다. 그런데 이 총리에게 관심이 과도하게 집중되면서 리스트에 오른 다른 이들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다. 여론의 관심이 리스트에 오른 8명 가운데 약 90%가 이 총리에게 집중됐고, 홍준표 경남도지사와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에게 약 10%의 관심이 모아졌다.
이 총리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된 사이 리스트에 오른 나머지 인사, 특히 허태열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유정복 인천시장 등 2007년 대통령선거(대선) 경선 당시 주요 구실을 했던 이들과 서병수 부산시장, 홍문종 전 새누리당 사무총장 등 2012년 대선 핵심 멤버들은 여론의 관심에서 한발 비켜서 있었다.
이 같은 현상이 비단 ‘성완종 리스트’에서만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전국 단위 선거를 치를 때는 어김없이 선택과 집중이 이뤄진다. 한 정치 지망생의 얘기다.
“선거에 나선 이들 가운데 거짓말을 하거나 불법, 탈법을 저지른 사람이 모두 처벌받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부가 적발돼 처벌받고 나머지는 그 일부를 방패삼아 무사히 임기를 마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적발되거나 처벌받지 않는 선에서 선거에 유리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려는 시도가 선거판에 만연해 있다.”
탈법·위법 선거운동의 유혹에서 정치인이 자유롭지 못한 이유가 그 때문이다. 법을 지켜 낙선하는 것보다 법을 위반하더라도 당선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만약 적발돼 문제가 되면 상황에 맞게 대처하려는 관행이 뿌리 깊이 남아 있다. 법을 지키는 데서 오는 마음의 평화보다 탈법·위법이 주는 ‘당선의 기쁨’ 같은 실리가 더 크기 때문이다. 정치인은 정치를 흔히 ‘살아 있는 생물’에 비유한다. 그 표현 속에는 정치인의 말이 한 번 내뱉으면 변하지 않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생물처럼 상황에 맞게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정치적 복선이 깔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