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북알프스에 선 여행자 왕영호 씨.
수화기 너머로 호스텔 직원이 고함을 쳤다. 멀리서 아득하게 “응!” 하는 대답이 들리더니 이내 “여보세요” 하는 경쾌한 음성이 전화선을 타고 넘어왔다. 말레이시아 말레카 지역의 여행자 숙소에 머물고 있는 왕영호(46) 씨와 e메일 소통 몇 번 만에 진짜 대화를 나눈 순간이다. 그는 4월 태국 푸껫으로 떠난 뒤 석 달째 동남아시아 각지를 여행 중이다. 푸껫에서 산 중고 모터사이클에 캠핑 장비를 싣고 다니며 여건이 될 때마다 길 위에 텐트를 친다.
“보통 해외여행을 가면 자연보다는 문화, 특히 인간이 만들어 놓은 도시를 보는 데 집중하잖아요. 캠핑은 달라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죠.”
1999년 인터넷 여행사이트 ‘아쿠아’(www.aq.co.kr)를 만들어 우리나라에 자유여행 문화를 확산하는 데 앞장선 왕씨가 해외캠핑에 푹 빠진 이유다. 그는 2007년 지인과 함께 일본으로 캠핑을 떠났다가 ‘진정한 자유’를 느꼈다고 한다.
내 맘대로 진정한 자유 만끽
해외캠핑 여행자들은 도시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는 점을 캠핑의 매력으로 꼽는다.
여행과 일상이 조화를 이루는, 그의 표현으로 하면 ‘자유인생’을 추구하게 됐다는 뜻이다. 왕씨처럼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한다 해도, 많은 이가 여행을 통해 남다른 체험을 하길 원한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여행’만 쳐 넣어도 수만 건의 정보가 보기 좋게 정렬되고, 여행사에 전화를 걸면 당장 세계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바우처를 손에 쥘 수 있는 시대에 여전히 많은 사람이 ‘여행의 기술’을 궁금해하는 이유다.
지난해 말 한국관광공사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해외여행 트렌드’ 설문조사에서도 이런 경향이 드러난다. 이 조사에서 응답자의 84.6%는 올해 해외여행을 갈 뜻이 있다고 밝혔고, 그중 36.7%가 여행사의 도움을 받지 않는 개인자유여행을 하고 싶다고 답했다. 여행사가 항공권과 숙박 예약만 대행해주는 에어텔 상품을 이용하겠다는 응답도 18.2%로, 두 명 중 한 명 이상이 자유로운 여행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유여행 마니아인 한의사 이지영(42) 씨는 이에 대해 “우리나라에 해외여행이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는 누구나 패키지 상품을 이용했다. 나 역시 2000년대 초반 몇 차례 패키지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런데 여행사가 정한 대로 움직이려니 불편하고 아쉬운 점이 많더라. 조금 번거롭더라도 직접 일정을 짜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고 밝혔다. 이후 캐나다 밴쿠버, 미국 LA 등으로 자유여행을 다녀온 그는 요즘은 7월 말 가족과 함께 떠날 호주 여행 준비에 한창이다.
그의 이번 여행 콘셉트는 ‘현지인처럼, 자유롭게’. 이를 위해 온라인 숙소 공유 사이트 ‘에어비앤비’(www.airbnb.co.kr)를 통해 호주 골드코스트 지역의 아파트를 빌렸다. 교통이 편리하고 근처에 대형마켓이 있어 장을 보기도 쉬운 곳이다. 이씨는 “이 집에서 직접 밥해 먹고 아이들과 동네 도서관이나 수영장을 다니며 정말 현지인처럼 쉬다 올 생각”이라고 했다. 현지에 오래 있으려면 이동 비용을 줄여야겠다 싶어 항공권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올 초 일찌감치 항공권부터 샀고, 최근엔 각종 웹사이트에서 지역 정보를 수집 중이다. 이씨는 “따지고 보면 이번 여행을 준비한 기간이 반년쯤 된다. 그사이 가족과 수시로 호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각자 원하는 바를 반영해 숙소와 일정을 정한 덕에 이미 여행을 시작한 듯한 기분도 든다. 이것이 자유여행의 또 다른 매력”이라고 했다.
한의사 이지영 씨의 자녀들은 캐나다 밴쿠버에서 자유여행을 하면서 현지 문화센터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시내 수영장 등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씨가 이용한 에어비앤비는 이런 여행을 준비하는 이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사이트다. 출발은 단순했다. 20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청년 3명이 비싼 아파트 월세에 시달리다 자신들이 사는 아파트 거실에 공기 매트리스(airbed) 세 개를 깔고 인터넷에 사진을 올려 투숙객을 모은 것. 의외로 호응이 뜨겁자 이들은 매트리스 숙박에 아침식사(breakfast)까지 제공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이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회원끼리 숙박 정보를 공유하고 예약까지 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만든 게 에어비앤비다. 에어비앤비 한국사무소 이성아 AE는 “현재 세계 190개국 3만5000여 개 도시에 약 60만 개의 숙소가 등록돼 있다. 아파트부터 고성(古城), 별장, 보트, 자동차까지 다양한 장소에서 투숙 중인 여행객 수도 약 1500만 명”이라고 밝혔다.
자유여행객들이 여행 정보를 공유하는 온라인 여행자 모임에는 이런 사이트를 이용해 좋은 숙소를 고르는 방법이 가득 올라와 있다(상자기사 참조). ‘자유인’ 왕영호 씨처럼 스스로 집(텐트)을 지고 다니며 자연을 벗 삼아 여행하려는 이도 많다. 왕씨는 “요즘에는 세계 어디에나 캠핑을 즐기는 이들이 있기에 곳곳에서 캠핑할 장소를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그가 초행자들에게 ‘강추’하는 해외캠핑 명소는 일본 카미코지(上高地). 일본에서 ‘북알프스의 심장’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해발 3000m가 넘는 산에 둘러싸인 고원이다. 왕씨는 이곳을 “워낙 깊숙하고 은밀한 곳이라 19세기 서구 탐험가에 의해 비로소 발견됐다. 지금도 11월부터 4월까지는 출입이 통제되고, 그 외 시기에도 한정된 인원만 정부가 운행하는 전기버스를 타야 입장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이 모든 제한은 역설적으로 카미코지를 세상에 다시없는 낙원으로 만들었다. 천혜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간직돼 있고, 캠핑객의 안전도 보장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이가 이런 과정을 직접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때문에 ‘특별한 경험’을 꿈꾸지만 정보와 시간이 부족한 이들을 위해 ‘프라이빗 서비스’를 표방하는 여행사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2012년 2월 말 문을 연 온라인 여행 사이트 ‘에바종’(www.evasion.co.kr)의 오수경(35) 상무는 “우리는 누구나 살 수 있는 패키지 상품을 팔지 않는다. 대신 각각의 요구에 맞는 개인화된 여행을 만들어준다”며 “이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은 여행지에서 한국인과 마주치는 걸 좋아하지 않고, 관광명소보다 숙소를 중요하게 여기며,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어 하는 게 특징”이라고 밝혔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저서 ‘여행의 기술’에서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그러나 실제로 여행의 기술은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사소하지도 않은 수많은 문제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고 했다.
나는 왜 여행을 떠나려 하는가. 그곳에서 무엇을 얻고 느끼려 하는가에 따라 세상에는 수천, 수만 가지 여행이 생겨날 수 있다. 이제 책장을 넘겨 가장 아름다운 여행을 구성하는 건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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