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4월 대구 지하철공사장 폭발 사고.
세월호 참사와 사고 수습 과정에서 나타난 시스템의 총체적 부재는 여권에겐 분명 악재다. 당장 박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48%로 2주 전보다 11%p 하락했다(한국갤럽, 4월 28~30일, 전국 19세 이상 1008명 대상). 국정 수행 부정평가도 2주 만에 12%p 급상승해 40%를 기록했다.
대형 이슈가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만, 그렇다고 야권 지지율을 상대적으로 높여주는 것은 아니다. 한국갤럽 조사에서도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지지율은 각각 39%, 20.6%로 2주 전 대비 6%p, 1%p 동반 하락했다. 세월호 참사가 여당에 대한 불신을 넘어 정치권 전반에 대한 불신으로 확산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렇다면 대형 이슈가 터진 뒤 치른 역대 지방선거 결과는 어떠했을까. 세월호 침몰 같은 과거 대형 재난사고나 월드컵 같은 대형 이슈는 선거 구도 흐름을 바꿔놓았다. 선거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선거에서 중요한 요소인 대통령 지지율과 정당 지지율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일단 대형 이슈가 발생하면 대통령 지지율은 대체로 하락한다. 집권 여당 지지율 역시 동반 하락 현상을 보인다. 특히 대형 재난이 발생했을 때 그 책임이 대통령이나 정부에 있는 ‘내부 책임 귀속형’의 경우 대통령 지지율과 집권 여당의 지지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반대로 이슈 발생 책임을 대통령에게 묻는 것이 지나치다고 판단되는 ‘내부 결집 유발형’의 경우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은 상승한다.
대구 가스폭발 사고…무소속 당선
내부 책임 귀속형의 대표적 사례는 제1회 지방선거.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서치앤리서치에 따르면, 1994년 10월 21일 서울 성수대교가 붕괴했을 때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은 56.8%(1994년 9월)였다. 8개월 뒤인 95년 6월 지방선거를 치른 시점에 김 대통령의 지지율은 51.8%였다. 선거 이틀 뒤인 6월 29일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발생하면서 김 대통령 지지율은 43.1%로 곤두박질쳤다. 연이은 대형 사고로 김 대통령과 여당이 동반 침몰한 것이다.
제1회 지방선거에 직격탄을 날린 사고는 대구 지하철공사장 가스폭발 사고였다. 선거 두 달 전인 1995년 4월 28일 대구 달서구 지하철공사장에서 가스가 폭발해 101명이 사망하고 146명이 부상했다. 사고 수습 과정에서 민심이반이 두드러지면서 집권 민주자유당은 광역단체장 5명(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 소속 8명, 무소속 2명)을 내는 데 그쳤다. 특히 ‘텃밭’ 대구에서 문희갑 무소속 후보가 36.8% 득표율을 기록해 민주자유당 조해녕(16.9%), 자유민주연합 이의익(22.1%) 후보를 크게 앞질렸다. 가스폭발 사고 이전만 해도 문희갑, 조해녕 후보가 엎치락뒤치락 혼전 양상을 보이던 터였다.
당시 수사당국은 사고 원인에 대한 정확한 진상과 책임 소재를 밝히지 못한 채 공사 실무자들만 구속하는 선에서 수사를 매듭지으려 했고, ‘선거를 의식한 여론 잠재우기’라는 비판이 일었다. 결국 이러한 민심은 투표로 이어졌다. 세월호 침몰 사고 수습과 원인 규명, 책임자 처벌 등이 6·4 지방선거 표심의 주요 향배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열리기 직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지지율은 양호한 편이었다. 월드컵 개최 한 달 전인 5월 김 대통령의 지지율은 44.2%. 임기 마지막 해인 점을 감안하면 경쟁력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월드컵이 개최되자 모든 정치적 사안은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월드컵 기간인 6월 13일 치른 제3회 지방선거는 역대 가장 낮은 투표율(48.9%)을 기록하며 ‘잊힌 선거’가 됐다. 전체 유권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투표율 탓에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이 나왔다.
무관심과 내부 결집 이슈
2002년 6월 22일 광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일월드컵 8강전에서 승리한 한국 선수들.
정당 지지율도 비슷한 추세를 보였다. 월드컵 한 달 전인 5월 집권 여당인 새천년민주당 지지율은 24.4%, 야당인 한나라당은 24.2%였다. 그러나 월드컵이 시작되자 한나라당 지지율은 34%로 치솟은 반면 새천년민주당은 22%로 지지율이 소폭 하락했다. 월드컵 직후인 7월 한나라당 지지율은 26.6%, 새천년민주당은 15.3%로 크게 추락했다(그래프 참조). 집권 후반기인 만큼 한나라당의 정권심판론이 먹혀든 측면도 있지만, 정치적 무관심이 커지면 여당이 선거주도권을 잡기 힘들다는 점도 증명한 선거였다. 당시 지방선거에서 야당인 한나라당은 광역단체장 11명, 자유민주연합은 1명(충남)을 냈지만, 여당은 광역단체장 4명(광주, 전남, 전북, 제주)을 배출하는 데 그쳐 광역단체장 승률 25%를 기록했다.
반면 1998년 실시한 6·4 지방선거 결과는 달랐다.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98년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가 본격 시작되는 해였다. 97년 12월 IMF로부터 550억 달러 구제금융을 받고 그 대가로 한국 경제운영권을 넘겨준 지 6개월 뒤 치른 선거였다. 대통령 집권 1년 차인 데다, 국가적 위기 상황인 만큼 이를 극복하려고 대통령과 여당에 힘을 실어주는 사회 분위기가 선거 결과에 나타났다. 김 대통령은 80%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했다.
그 결과 공동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서울, 경기, 광주, 전남, 전북, 제주 6곳)와 자유민주연합(인천, 대전, 충남, 충북 4곳)은 10곳에서 승리하며 대통령선거(대선)에 이은 ‘DJP연대’의 완벽 공조를 자랑했다. 광역단체장 승률 62.5%였다. 이와 같은 내부 결집 유발형 이슈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01년 미국 9·11 테러 직후 국가 위기 상황에 대한 국민적 결집은 당시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을 끌어올렸고, 2004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로 탄핵 직전 30%대 초반에 머물렀던 노 대통령의 지지율은 40%대 초반까지 치솟았다.
노 대통령 집권 4년 차인 2006년 5월 31일 제4회 지방선거는 역대 대통령 지지율이 가장 낮을 때 치른 선거였다. 대형 이슈도, 재난도 없는 만큼 선거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반발 기류 속에 정권심판론이 먹혀들면서 집권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전북 1곳(전북)에서만 광역단체장을 배출했다. 제2 야당인 민주당이 광주와 전남 2곳에서, 제1 야당인 한나라당은 나머지 12곳에서 압승했다. 정국 주도권은 급격히 야당에게 쏠렸고, 1년 뒤 있을 대선에서 ‘여당 참패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천안함 폭침 때도 견제 선택
2010년 3월 서해상에서 초계함인 천안함이 침몰한 가운데 경기 평택 해군 2함대사령부를 찾아 생존자로부터 침몰 상황에 대해 설명을 들은 실종자 가족들이 부실한 설명에 항의해 부대를 다시 찾았다.
그러나 ‘무상급식’이 선거 이슈로 재점화됐고, 4대강 사업 등에 대한 이 대통령의 중간평가론이 먹혀들면서 대통령 지지율은 3개월 뒤 44.4%(2010년 6월)로 추락했다. 개표 결과 야당인 민주당이 7곳(인천, 강원, 광주, 전남, 전북, 충남, 충북)에서, 자유선진당이 1곳(대전)에서 승리했고 여당인 한나라당은 서울, 부산, 대구, 울산, 경남, 경북 6곳에서 승리하는 데 그쳤다. 한나라당의 전통 지지기반으로 여겨지던 강원도와 경남을 민주당 이광재, 김두관 후보에게 내주면서 한나라당은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천안함 폭침 사고 속에서도 민심은 안정보다 견제를 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