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음식과 정의, 평화’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하는 밥상·농업·생명살림 운동’ ‘통섭적 미각교육의 철학과 실천’ ‘아시오의 농업과 생물 다양성’ 같은 국제 콘퍼런스 주제를 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국내 콘퍼런스 역시 농장동물복지, 갯벌, 로컬푸드 등 묵직한 주제를 걸고 있다. 10월 1~6일 경기 남양주시에서 열린 슬로푸드국제대회는 한편에서는 맛의 축제, 또 한편에서는 운동성 강한 집회로 읽힐 수 있다. 슬로푸드란 그런 것이다. 다양한 맛을 즐기려면 운동이 필요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이번 슬로푸드국제대회 공식 명칭은 ‘아시오 구스토(Asio Gusto)’다.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에서 최초로 열리는, 이 지역 슬로푸드를 알리는 국제대회다. 앞으로 2년에 한 번씩 열릴 예정이다.
음식은 구체적 실재로 늘 접하지만, 슬로푸드는 관념적이다. 그래서 슬로푸드에 대한 오해가 만연해 있다. 한국에서의 오해는 심각한 수준이다. 패스트푸드가 아니면 다 슬로푸드인 줄 아는 사람도 있고, 천천히 만들어 먹는 음식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가장 큰 오해는 모든 한국 음식을 슬로푸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국은 패스트푸드 천국
‘맛의 방주’에 등재된 제주 푸른콩장의 푸른콩. 제주에서는 이 콩으로 장을 담가 장콩이라 부른다고 한다(위). 2013 남양주 슬로푸드국제대회 국제관에는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의 독특한 토속 음식이 전시됐다. 일부는 시식도 할 수 있었다.
한국은 패스트푸드 천국이다. 한국 음식에서 주요 식재료인 간장, 된장, 고추장, 식초, 두부 등은 거의 공장 제조품이다. 따라서 이를 가지고 요리한 한국 음식 역시 패스트푸드일 따름이다.
2013 남양주 슬로푸드국제대회 개막식 행사는 아쉽게도 슬로푸드에 대한 오해를 여과 없이 보여줬다. TV 드라마 ‘대장금’ 화면 앞으로 궁중의상을 입은 여인네들이 등장해 허상의 한국적 전통과 슬로푸드의 교합을 시도했다. 이 땅의 먹을거리 생산자인 농민의 유구한 전통과 정신은 그 안에서 찾을 수 없었다. 내빈으로 참석한 정치인의 축사에서도 슬로푸드의 정신을 읽을 수 없었다.
오히려 외국에서 온 슬로푸드 운동가들이 이 운동의 방향성을 정확히 지적했다. 자본의 대규모 영농 탓에 사라져가는 생물종의 다양성을 걱정하고, 지속가능한 농업에 대한 지역적 고민도 나누고자 했다. 슬로푸드에 대한 아시아적 연대를 쌀 문화를 중심으로 엮어보자는 제안도 있었다.
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세계 각국 음식을 먹으며 즐거워했다. 단지 먹고 즐기기만 했다면 이 대회는 여타 음식 박람회와 다를 바 없다. 음식을 먹으며 생산자의 처지와 생산지의 자연환경을 잠시나마 생각했다면 이 대회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양주에서 맛있는 세계 각국 음식을 맛봤다는 단순한 추억을 넘어, 내가 먹는 음식을 누가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재배하는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조금이라도 남았다면 이 대회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