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필리핀 명문 아테네오마닐라대에 한국학 정규 수업이 생깁니다. 서강대와 우리 재단이 함께 한국학 온라인 강의 콘텐츠를 제작해 공급하고, 아테네오마닐라대 측은 이를 토대로 학점 인정 강좌를 만들기로 했어요. 8월 1일 현지에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습니다.”
8월 5일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 Foun dation·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유현석 이사장은 막 필리핀 출장을 다녀온 참이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MOU 체결 외에도 현지에서 한 일이 많았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가 아테네오마닐라대 교원 및 학생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국의 안보현황과 동아시아 국제관계’ 특강에 참석했고, 마닐라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현대판화 50년전’ 개막식에도 갔다. 국제교류, 학술, 문화 등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한 이 모든 행사는 재단이 마련한 것들. 앞선 특강은 한국을 아세안지역에 알리기 위한 연속 특강 ‘KF 렉처 시리즈’ 중 하나고, 뒤의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과 공동 주최한 것이다.
1992년 문을 연 재단은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공공기관이다. 유 이사장은 “외국인이 한국을 알고, 이해하고, 나아가 호감을 갖도록 하는 게 우리의 일”이라고 설명했다.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외교부 자체평가위원 등을 지낸 그는 5월 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이후 두 달여가 흐르는 동안 재단의 사업 범위가 광범위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고 한다.
특히 최근 케이팝 등을 중심으로 한 한국 문화 콘텐츠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한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재단이 할 일도 많아졌다. 유 이사장은 “우리 대중문화가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넓히는 건 분명하다”며 “다만 가요와 드라마 등을 통해 드러나는 한국의 모습은 단편적이고 휘발성이 높다는 게 문제”라고 했다.
미래 세대에 ‘한국 알리기’는 곧 국익
한국국제교류재단은 8월 1일 서강대, 아테네오마닐라대와 한국학 온라인 강의 개설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왼쪽부터 김동택 서강대 교수, 호세 라몬 빌라린 아테네오마닐라대 총장, 유현석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한국학은 한국에 관한 모든 연구를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말.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한국학은) 한국의 역사, 지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따위를 다룬다’고 규정한다. 재단은 창립 후부터 줄곧 해외에서 한국에 대한 연구가 확산되도록 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1993년 미국 하버드대와 컬럼비아대에 한국 문학 및 역사 교수직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세계 12개국 76개 대학에 한국학 교수직 113개를 설치했다. 한국 관련 강의 개설도 지원했다. 재단 설립 전인 90년 당시 한국에 대해 강의하는 대학은 세계 32개국 152개교에 불과했지만, 2012년에는 81개국 845개교에서 한국학을 가르친다. 5배 이상 증가한 셈이다.
유 이사장은 “이 수업들을 통해 외국 학생은 한국 사회와 문화가 지니는 고유 특성을 배우고,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며 “세계 각국 지도자를 길러내는 주요 대학을 중심으로 한국학 강좌를 운영함으로써 미래 세대를 이끌어갈 이들이 한국에 대해 바른 정보를 접할 수 있게 하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또 “현대 외교에서는 상대국 국민의 공감과 호의를 얻어내 원하는 바를 이루는 ‘소프트파워’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며 “한국학은 외교 관계에서 우리의 국익을 수호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자국 문화와 학문을 널리 알림으로써 국가 이미지를 바꾼 나라로는 독일과 일본이 대표적이다. 유 이사장에 따르면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국가를 재건하면서 동시에 독일어 및 독일 문학, 음악, 철학 등에 대한 해외 연구를 적극 지원했다. 특히 ‘괴테 인스티튜트’ 등을 통해 자국 작가와 철학자를 널리 알렸다. 그 결과 ‘철학과 문학의 나라’라는 새로운 인상을 국제사회에 각인시키게 됐다.
일본 역시 제2차 세계대전 패전과 1960년대 급속한 경제성장 이후 널리 퍼진 ‘패전국’ ‘경제동물’ 이미지를 단기간에 반전시켰다. 72년 일본 외무성 산하에 설립한 일본국제교류기금(Japan Foundation)은 해외에 일본 역사, 문화, 예술 등을 소개하고 친일파 학자를 육성하는 데 앞장섰다. 소설 ‘설국’을 번역해 원작자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노벨문학상을 타는 데 기여한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 전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 에즈라 보걸 하버드대 교수 등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해외 석학들은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반면 최근 케이팝 등을 계기로 세계 각국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에도 , 한국학의 국제적 위상은 여전히 낮은 수준이라는 게 유 이사장의 지적이다. 재단 자료에 따르면 2012년 7월 현재 미국 내 주요 대학 15곳의 중국학 강좌 수는 760개, 일본학 강좌 수는 568개다. 반면 한국학 수업은 342개에 불과하다. 각 대학에 소속된 교수·강사 수도 중국학 268명, 일본학 246명인 데 비해 한국학은 76명에 그쳤다. 북미지역에서 아시아 관련 자료가 많은 도서관 상위 10곳의 자료 보유량을 비교한 결과 한국 관련 장서는 109만9826점으로 중국(565만7845점)의 5분의 1, 일본(368만4960점)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다양한 분야의 강의 가능
유 이사장은 “해외 대학에 한국학 교수직을 만들고 각종 자료를 비치하게 하려면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든다. 이미 오랫동안 세계에 자국을 알려온 중국과 일본을 단숨에 따라잡는 건 어려운 일”이라며 “재단은 우리가 처한 환경에서 가능한 한 널리 한국학을 확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2011년 시작한 ‘KF 글로벌 e스쿨(Global e-School)’은 이 같은 노력의 일환이다. 해외 학생이 화상을 통해 실시간으로 우리나라 교수의 강의를 들을 수 있게 한 프로그램으로, 지난해 23개국 53개 대학에서 114개 강의를 운영했다. 2630명이 이 수업을 통해 한국을 배웠다. e스쿨 강의 이후 한국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면서 해당 대학에 관련 전공이 만들어지는 효과도 거뒀다. 러시아 고등경제대와 홍콩대가 각각 2011년 9월과 지난해 9월 한국학 전공을 개설한 것. 베트남 하노이 국립외국어대는 지난해 9월 한국학과를 ‘동방학부’에서 분리해 독립 학부로 승격했다.
유 이사장은 “비용 대비 파급효과가 매우 크다”고 자랑스러워했다. e스쿨의 또 다른 장점으로 “다양한 분야의 강의가 가능해졌다는 점”도 꼽았다. 지금까지는 해외에 한국학 교수직을 만들거나 객원교수를 파견할 때 한국어 전공자를 배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화상 강의의 경우 70% 정도가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국제관계 등 사회과학 분야를 다룬다.
유 이사장은 “재단 설립 후 20여 년이 흐르는 동안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특히 최근의 한류는 우리나라에 매우 좋은 기회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의 공공외교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