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부터 문제다. 성희롱은 영어 ‘sexual harassment’를 옮긴 것인데, 오역이다. ‘harass’는 ‘집요한 괴롭힘, 모욕, 학대, 함부로 대하다’라는 뜻이다. ‘희롱’과는 거리가 있다. 현실보다 약한 의미로 번역한 것이다. 희롱(弄)은 장난이나 농담, 추근대다(flirt)라는 어감이 강해서 오해 소지가 있다. 일본에서는 번역하지 않고 영어 그대로 발음한다(‘세쿠 하라’).
사실 성희롱은 합의될 수 없는 개념이다. 여성 지위와 사회적 인식 변화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성희롱 현실은 인류 초기부터 있었으나 이 현실이 사회적 의제로 언어화되기까지는 가부장제 역사만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성희롱뿐 아니라 성별(性別)과 관련한 거의 모든 이슈가 그러하다. ‘개념 혼란기’에 장난에서 폭력까지 해당 범위마저 넓다 보니 가해자는 가해자대로, 피해자는 피해자대로 억울한 경우가 많다.
아마 성희롱에 대한 남성의 가장 큰 고민, 혹은 반발은 상대방(여성) 주장이 ‘자의적’이라는 점일 것이다. 어디까지가 성희롱이고, 그것을 어떻게 여성의 일방적 판단에 맡길 수 있느냐는 것. 특히 정치인이나 연예인 등 유명 인사의 성희롱 사건은 진위와 무관하게 뉴스 자체로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기 때문에 가해자(용의자)가 더 큰 피해자라는 인식도 상당하다(실제로는 최연희 전 한나라당 의원 경우처럼 유야무야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무지 탓에 무의식적으로 행동
성희롱은 범위가 넓지만, 여성 신체 촬영(몰래카메라·몰카)이나 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의 모욕적 행위는 현행법상 위법이다. 범죄 성립은 가해자나 피해자의 의도와 무관한 ‘행위’ 그 자체다. 사건 당사자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피해자가 절도당한 사실을 숨겼다고 해서, 가해자가 횡령이라고 생각지 않는다고 해서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 건 아니다. 성희롱처럼 여성에 대한 폭력(gender violence)은 그냥 ‘단순한’ 사건이다. 타인에 대한 인권 침해이자 불법 행위로, 사과가 아니라 처벌 사안이다. 범죄 행위를 ‘친근감 표현’이라고 인식하는 경우는 성희롱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자연스럽고 광범위하게 행해진다는 얘기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성희롱 개념은 상대방에게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수치심의 내용이 모호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지만, 남녀 사이에 주로 발생해 ‘성’희롱일 뿐이지, 보편적인 인권 문제다. 장애인, 이주노동자, 동성애자, 노인, 건강 약자(특히 정신질환자), 가난한 사람에 대한 차별적 행동, 지역이나 학벌에 관한 비하…. 우리는 모두가 잠재적 혹은 실재적 가해자이자 피해자다. 노인 폄하 발언이 선거 판세를 좌우하기도 하고, 특정 지역에 대한 편견이 정치적 이슈가 된다. 다시 말해, 성별이 아니더라도 타인의 신체에 대한 언급은 ‘칭찬’이든 아니든, 인권침해 또는 최소한 실례가 되는 행동이다.
그러나 위 사안들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공적 영역에서 쉽게 발언하지 않는다. 그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가 있고, 이를 위반했을 경우 비판 대상이 되는 까닭이다. 하지만 성희롱은 그렇지 않다. 함부로 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매우 둔감하기까지 하다. 이것이 성희롱의 ‘특수성’이다.
성희롱 발생의 가장 큰 구조적 원인은 여성 몸에 대한 남성 중심적 해석이다. 여성은 몸에 대한 언급에 민감하다. ‘흑인’이나 ‘장애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백인’이나 ‘비장애인’처럼, 남성은 이 사실에 대해 무지하다. 결과적으로 성희롱은 특별한 경우(상대 여성을 통제하려는 의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고의가 아니다. 무지 탓에 무의식적으로 저지른다.
남녀 모두 성별제도 아래에서 형성된 성별화된(gendered) 존재이지만, 남성은 성별이라는 몸의 특징으로부터 자유롭다. 남성은 인간이지만 여성은 여성인 것이다. 성희롱은 여성이 차별받는 구조, 즉 남성 사회가 규정한 몸의 지위를 남성이 반복적으로 평가하는 행위다. ‘깜둥이’ ‘병신’과도 같은 의미이다. 이 말이 친근감의 표현인가. “당신은 깜둥이라 힘이 셀 것이다”가 칭찬일까.
그렇기 때문에 남성이 여성 몸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와 그 반대의 경우는 같은 차원일 수 없다. 여성은 남성 몸을 비하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다. 남성은 그런 말을 들어도 ‘덜’ 치명적이다. 몸으로 판단되지 않기 때문이다. 남성의 지위와 자아존중감은 사회적 자원(돈, 기술, 지식 등)에 의해 정해진다. 반면 여성은 몸무게, 얼굴, 몸매, 옷차림, 행동 등 몸의 모든 영역이 존재 전반의 지위로 전환된다.
남성 역시 키나 머리숱 여부로 ‘고통’ 받지만, 그것은 부분이지 한 인간 전체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않는다. 몸, 성의 의미가 남녀에 따라 크게 다르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차이는 남성(사회)이 규정하고 판단한다. 예를 들어, 남성에게 털(hair)은 권위(수염)와 강함(가슴의 털)을 상징하지만, 여성의 털은 수치스럽게 여겨진다. 그래서 남자는 털을 심고 여성은 제모를 한다.
어머니와 ‘창녀’의 이중성
여성이 성 문제에 민감한 이유는 성의 이중 규범(double standard)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섹슈얼리티에 관해 남성에게 대단히 관대하지만, 여성에겐 시민권을 빼앗을 만큼 가혹하다. 여성은 직장생활을 해도 사적(私的) 존재로 인식된다. 특히 직장 내 성희롱은 남성이 여성을 사적 존재로 환원할 때 발생한다.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여성 동료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거나 엉덩이를 만지는 행위는 그녀를 동료가 아니라 여자로 보기 때문이다.
남성에게 사적 영역이란 ‘쉬는 곳’(가정)과 ‘노는 곳’(유흥업소)을 의미하는데, 이는 ‘어머니와 창녀’라는 여성에 대한 이분화로 연결된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라는 말은 있어도 ‘남성의 사회 진출’이라는 말은 없다. 여성의 ‘본래 자리’는 가정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남성은 집 밖에서 일하는 여성을 무의식적으로 ‘훼손된 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여성은 남성의 ‘동료’ ‘경쟁자’ ‘적’이 될 수 없다는 (무)의식적 사고가 성희롱 사고를 부른다.
성희롱인가 아닌가의 첫 번째 판단은 내용 수위에 있는 게 아니다. 공적 영역에서 남성이 여성을 ‘동료’ ‘개인’ ‘인간’ 등 성 중립적 존재로 대했는가 아닌가에 달렸다. 자신의 출신 지역, 계층, 학벌, 나이를 끊임없이 언급, 평가받고 싶은 남성은 없을 것이다.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거의 평생 이러한 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관계가 성별에 의해 규정돼서는 안 된다. 1948년 유엔이 제정한 세계인권선언 첫 구절이다.
사실 성희롱은 합의될 수 없는 개념이다. 여성 지위와 사회적 인식 변화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성희롱 현실은 인류 초기부터 있었으나 이 현실이 사회적 의제로 언어화되기까지는 가부장제 역사만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성희롱뿐 아니라 성별(性別)과 관련한 거의 모든 이슈가 그러하다. ‘개념 혼란기’에 장난에서 폭력까지 해당 범위마저 넓다 보니 가해자는 가해자대로, 피해자는 피해자대로 억울한 경우가 많다.
아마 성희롱에 대한 남성의 가장 큰 고민, 혹은 반발은 상대방(여성) 주장이 ‘자의적’이라는 점일 것이다. 어디까지가 성희롱이고, 그것을 어떻게 여성의 일방적 판단에 맡길 수 있느냐는 것. 특히 정치인이나 연예인 등 유명 인사의 성희롱 사건은 진위와 무관하게 뉴스 자체로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기 때문에 가해자(용의자)가 더 큰 피해자라는 인식도 상당하다(실제로는 최연희 전 한나라당 의원 경우처럼 유야무야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무지 탓에 무의식적으로 행동
성희롱은 범위가 넓지만, 여성 신체 촬영(몰래카메라·몰카)이나 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의 모욕적 행위는 현행법상 위법이다. 범죄 성립은 가해자나 피해자의 의도와 무관한 ‘행위’ 그 자체다. 사건 당사자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피해자가 절도당한 사실을 숨겼다고 해서, 가해자가 횡령이라고 생각지 않는다고 해서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 건 아니다. 성희롱처럼 여성에 대한 폭력(gender violence)은 그냥 ‘단순한’ 사건이다. 타인에 대한 인권 침해이자 불법 행위로, 사과가 아니라 처벌 사안이다. 범죄 행위를 ‘친근감 표현’이라고 인식하는 경우는 성희롱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자연스럽고 광범위하게 행해진다는 얘기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성희롱 개념은 상대방에게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수치심의 내용이 모호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지만, 남녀 사이에 주로 발생해 ‘성’희롱일 뿐이지, 보편적인 인권 문제다. 장애인, 이주노동자, 동성애자, 노인, 건강 약자(특히 정신질환자), 가난한 사람에 대한 차별적 행동, 지역이나 학벌에 관한 비하…. 우리는 모두가 잠재적 혹은 실재적 가해자이자 피해자다. 노인 폄하 발언이 선거 판세를 좌우하기도 하고, 특정 지역에 대한 편견이 정치적 이슈가 된다. 다시 말해, 성별이 아니더라도 타인의 신체에 대한 언급은 ‘칭찬’이든 아니든, 인권침해 또는 최소한 실례가 되는 행동이다.
그러나 위 사안들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공적 영역에서 쉽게 발언하지 않는다. 그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가 있고, 이를 위반했을 경우 비판 대상이 되는 까닭이다. 하지만 성희롱은 그렇지 않다. 함부로 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매우 둔감하기까지 하다. 이것이 성희롱의 ‘특수성’이다.
성희롱 발생의 가장 큰 구조적 원인은 여성 몸에 대한 남성 중심적 해석이다. 여성은 몸에 대한 언급에 민감하다. ‘흑인’이나 ‘장애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백인’이나 ‘비장애인’처럼, 남성은 이 사실에 대해 무지하다. 결과적으로 성희롱은 특별한 경우(상대 여성을 통제하려는 의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고의가 아니다. 무지 탓에 무의식적으로 저지른다.
남녀 모두 성별제도 아래에서 형성된 성별화된(gendered) 존재이지만, 남성은 성별이라는 몸의 특징으로부터 자유롭다. 남성은 인간이지만 여성은 여성인 것이다. 성희롱은 여성이 차별받는 구조, 즉 남성 사회가 규정한 몸의 지위를 남성이 반복적으로 평가하는 행위다. ‘깜둥이’ ‘병신’과도 같은 의미이다. 이 말이 친근감의 표현인가. “당신은 깜둥이라 힘이 셀 것이다”가 칭찬일까.
그렇기 때문에 남성이 여성 몸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와 그 반대의 경우는 같은 차원일 수 없다. 여성은 남성 몸을 비하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다. 남성은 그런 말을 들어도 ‘덜’ 치명적이다. 몸으로 판단되지 않기 때문이다. 남성의 지위와 자아존중감은 사회적 자원(돈, 기술, 지식 등)에 의해 정해진다. 반면 여성은 몸무게, 얼굴, 몸매, 옷차림, 행동 등 몸의 모든 영역이 존재 전반의 지위로 전환된다.
남성 역시 키나 머리숱 여부로 ‘고통’ 받지만, 그것은 부분이지 한 인간 전체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않는다. 몸, 성의 의미가 남녀에 따라 크게 다르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차이는 남성(사회)이 규정하고 판단한다. 예를 들어, 남성에게 털(hair)은 권위(수염)와 강함(가슴의 털)을 상징하지만, 여성의 털은 수치스럽게 여겨진다. 그래서 남자는 털을 심고 여성은 제모를 한다.
어머니와 ‘창녀’의 이중성
여성이 성 문제에 민감한 이유는 성의 이중 규범(double standard)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섹슈얼리티에 관해 남성에게 대단히 관대하지만, 여성에겐 시민권을 빼앗을 만큼 가혹하다. 여성은 직장생활을 해도 사적(私的) 존재로 인식된다. 특히 직장 내 성희롱은 남성이 여성을 사적 존재로 환원할 때 발생한다.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여성 동료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거나 엉덩이를 만지는 행위는 그녀를 동료가 아니라 여자로 보기 때문이다.
남성에게 사적 영역이란 ‘쉬는 곳’(가정)과 ‘노는 곳’(유흥업소)을 의미하는데, 이는 ‘어머니와 창녀’라는 여성에 대한 이분화로 연결된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라는 말은 있어도 ‘남성의 사회 진출’이라는 말은 없다. 여성의 ‘본래 자리’는 가정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남성은 집 밖에서 일하는 여성을 무의식적으로 ‘훼손된 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여성은 남성의 ‘동료’ ‘경쟁자’ ‘적’이 될 수 없다는 (무)의식적 사고가 성희롱 사고를 부른다.
성희롱인가 아닌가의 첫 번째 판단은 내용 수위에 있는 게 아니다. 공적 영역에서 남성이 여성을 ‘동료’ ‘개인’ ‘인간’ 등 성 중립적 존재로 대했는가 아닌가에 달렸다. 자신의 출신 지역, 계층, 학벌, 나이를 끊임없이 언급, 평가받고 싶은 남성은 없을 것이다.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거의 평생 이러한 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관계가 성별에 의해 규정돼서는 안 된다. 1948년 유엔이 제정한 세계인권선언 첫 구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