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이 드디어 시행됐다. 뉴스통신사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김영란법 덕에 남편 회식이 없어 좋다’는 누리꾼 글이 인터넷 여성 커뮤니티에 올라온단다. ‘조선일보’는 김영란법 시행 후 외식을 자제하고 집에서 ‘혼술’하는 공무원이 늘었다고 보도했고, ‘동아일보’는 ‘김영란법은 가족과 함께 ‘저녁이 있는 삶’을 만들어가는 데 기여할 것’(황호택 칼럼)이라고 했다.
저녁이 있는 삶.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지난 대통령선거에 출사표를 내며 제시했던 슬로건이다. 정치인이 내세운 구호 가운데 이보다 더 직장인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도 없을 테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저녁이 있는 삶을 반기지는 않는가 보다.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는 국회 기자간담회에서 “김영란법 시행으로 저녁이 있는 삶이 실현됐다”고 주장하며 “부인들이 남편 밥 해줘야 한다고 짜증낸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MBC 뉴스도 김영란법 시행 후 남편이 일찍 퇴근해 아이들과 놀아줘 좋기는 한데 부인들의 일이 2~3배 늘었다고 보도했다.
아마도 대다수 직장인이 꿈꾸는 저녁이 있는 삶은 노동시간과 회식이 줄어 친구와 더 많이 교류하고, 취미생활을 하며, 더 많은 여가를 즐기는 삶일 것이다. 한국 직장인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손학규 전 대표는 저녁이 있는 삶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안으로 정시 퇴근과 노동시간 상한제 등의 공약을 내걸었다. 하지만 저녁이 있는 삶을 즐기는 많은 선진국의 모습은 한국 직장인, 특히 남성 직장인이 그리는 모습과 다를 것이다.
일찍 퇴근해 집안일 하는 남자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성에게 저녁이 있는 삶은 여가시간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일터에서 보내는 시간이 줄어드는 대신 가사노동이 늘어나는 삶을 의미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 성인 남성이 하루 중 가사노동으로 보내는 시간은 45분으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짧다. 복지국가인 덴마크 남성의 하루 평균 가사노동시간은 3시간 6분으로 한국 남성보다 4배 이상 길다. OECD 평균은 2시간 18분으로 대다수 국가의 남성이 한국 남성보다 3배 이상 가사노동에 시간을 쓴다. 한국 남성이 노동시장에서 일하는 시간은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긴 편에 속하지만, 가사노동시간이 워낙 짧아 직장에서 노동시간과 가사노동시간을 합친 총 노동시간은 OECD 회원국 중 중간 정도에 불과하다. 미국, 캐나다, 오스트리아, 스웨덴 남성이 한국 남성보다 업무노동과 가사노동을 합친 총 노동시간이 더 길다.저녁이 있는 삶으로 가사노동이 늘어나리란 점은 다른 나라의 역사적 변화를 살펴봐도 명확하다. ‘그래프’는 20세기 이후 미국인의 주간 평균 가사노동시간 변화를 보여준다. 20세기 초 미국 남성의 평균 가사노동시간은 일주일에 4시간, 하루 34분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1920년대 이후부터 21세기 초까지 꾸준히 증가해 지금은 일주일에 16시간 40분, 하루 2시간 20분이 됐다. 지난 한 세기 동안 4배 늘어난 것이다. 현재 한국 남성의 평균 가사노동시간은 미국 남성의 30년대 가사노동시간과 비슷하다.
다시 미국 사례를 살펴보자. 남성의 가사노동시간이 늘어난 반면, 노동시장에서 소득을 올리는 노동시간은 줄었다. 업무노동과 가사노동을 합친 전체 노동시간은 어떻게 변했을까. 놀랍게도 전체 노동시간은 1930년대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즉 30년대에는 일주일에 40시간을 밖에서 일하고, 4시간 가사노동을 해서 총 44시간 일했다. 지금은 일주일에 27시간 30분을 밖에서 일하고, 16시간 30분을 가사노동에 써 역시 총 44시간 일한다. 소득이 있는 노동이 업무가사노동으로 바뀌었을 뿐 총 노동시간에는 변화가 없다. 총 노동시간에 변화가 없다 보니 여가에 쓸 수 있는 시간의 양 변화도 미미하다. 지난 한 세기 동안 미국 남성의 업무 노동시간은 40% 넘게 감소했지만 여가시간은 단지 30분 늘었을 뿐이다.
남성과 달리 미국에서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은 1960년대 이후 90년대까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 기간은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증대한 기간과 일치한다. 그렇다고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이 남성과 같아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여성이 남성보다 가사노동에 더 많은 시간을 쓴다. 2005년 현재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은 남성보다 일주일에 11시간, 하루에 1시간 30분 정도 더 길다(그래프 참조). 하지만 이 격차는 30년대 하루 5시간 이상 차이가 나던 것에 비하면 3분의 1 이하로 줄어든 것이다.
한국 남녀 가사노동 격차, 미국 1940년대 수준
현재 한국의 남녀 가사노동시간 격차는 하루 3시간이다. 남성이 하루 평균 45분 가사노동을 하는 것에 비해 여성은 하루 평균 3시간 50분 가사노동을 한다. 여성이 남성보다 5배 길다. 미국의 1940년대와 비슷한 수준이다. 성별 노동시간 격차 감소를 선진국을 판정하는 지표로 삼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긍정적 발전 방향으로 삼는 국가는 대부분 성별 노동시간 격차가 우리나라보다 현저히 적다. 저녁이 있는 삶을 온전히 누리는 복지국가에서 가사노동시간의 성별 격차는 1.5배 정도에 불과하다.다만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한국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이 다른 OECD 회원국에 비해 길지 않다는 사실이다. 남성의 가사노동시간이 현저히 짧아 성별 격차가 큰 것이지, 여성 가사노동의 절대 시간이 길지는 않다. 오히려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OECD 회원국들과 비교해 한국 여성의 업무 노동시간이 길다. 장시간 노동이 남성뿐 아니라 일하는 여성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저녁이 있는 삶이 여가시간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업무노동을 가사노동으로 전환할 뿐이라니! 뭔가 배신당한 느낌이 들지 않으면 이상하다. 이런 삶을 추구할 가치가 있을까.
답은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의 변화가 아니라 시간을 함께 보내는 대상의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 소득 수준이 비슷한 다른 국가에 비해 우리나라 사람의 행복감이 떨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사회적 관계의 밀도가 낮기 때문이다. 저녁이 있는 삶은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대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회식 대신 가족, 친구와 함께 저녁식사를 할 기회가 많아지는 삶이다. 이러한 변화는 가족관계를 공고히 하고 사회적 관계의 확장을 가져올 것이다.
우리나라 남성이 순수하게 여가에 보내는 시간은 하루 5시간 14분으로 OECD 회원국 평균보다 5분 적을 뿐이다(반면 한국 여성의 여가시간은 OECD 회원국 평균보다 45분 적다). 아마 이 시간이 더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함께 집안일을 하는 저녁이 있는 삶은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