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가 현대적인 와인 산업의 기반을 다진 것은 19세기 후반부터다. 이전까지는 포도 품종, 재배, 양조 등 모든 면에서 미흡해 와인 품질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됐다. 칠레 와인이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된 데는 돈 막시미아노 에라수리스(Don Maximiano Errazuriz)의 힘이 컸다. 그는 1870년 칠레 중부 아콩카과 밸리(Aconcagua Valley)에 포도밭을 일구고 프랑스에서 직접 포도를 들여오는 등 와인 고급화를 이끌었다.
에라수리스는 대통령 4명과 대주교 2명을 배출한 칠레 명문가다. 막시미아노도 성공한 정치가이자 사업가였다. 1800년대 후반 칠레 와이너리들은 주로 수도 산티아고 근교에 자리 잡았지만, 막시미아노는 ‘땅이 좋아야 포도가 맛있다’는 신념으로 더 나은 땅을 찾아 나섰다. 그가 선택한 곳은 산티아고에서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아콩카과 밸리였다.
아콩카과 밸리는 안데스 산맥에서 시작해 태평양으로 흘러들어가는 아콩카과 강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강 상류, 중류, 하류의 토질이 다른 것은 물론, 덥고 건조한 내륙부터 서늘한 해안까지 기후도 다양해 품종별로 가장 적합한 환경을 골라 포도를 재배할 수 있는 천혜의 와인 산지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막스 레제르바(Max Reserva) 시리즈는 최상의 조건에서 자란 포도의 순수하고 정직한 맛이 느껴진다. 우리나라에는 카베르네 소비뇽, 시라, 카르메네레, 샤르도네 등 4종이 수입되고 있다.
에라수리스는 현재 5대손인 에두아르도채드윅(Eduardo Chadwick)이 운영하고 있다. 채드윅은 1983년 가업을 계승한 뒤 프리미엄 와인 생산에 집중했다. 그중 돈 막시미아노 파운더스 리저브(Founder’s Reserve)는 설립자인 5대 조부에게 헌정하는 와인으로, 카베르네 소비뇽에 카르메네레와 말벡을 블렌딩한 보르도 스타일의 레드 와인이다. 아버지에게 바치는 와인으로는 비녜도(Vin˜edo) 채드윅이 있다. 채드윅의 아버지는 한때 국가대표 폴로 선수였는데, 아버지의 폴로 경기장이 포도밭으로 최적지임을 알아본 채드윅은 아버지를 설득해 경기장을 포도밭으로 바꿨다. 그리고 이곳에서 수확한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비녜도 채드윅을 만들었다. 레이블에 그려진 말을 탄 폴로 선수는 아버지를 기념하는 상징이다.
하지만 세상은 칠레 와인에 무관심했고 와인 평론가들도 칠레 와인을 좀처럼 평가해주지 않았다. 채드윅은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2004년 독일 베를린에서 에라수리스 와인을 라피트(Lafite)와 솔라이아(Solaia) 같은 세계적 명품과 비교하는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한 것이다. 참패할 경우 치명타를 입을 각오까지 했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에라수리스 와인이 1, 2, 4위를 차지했고 그중 1위가 비녜도 채드윅이었다. 이는 에라수리스는 물론 칠레 와인의 위상을 높이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우리에게 칠레 와인은 가격 대비 좋은 품질로 익숙하지만 칠레의 잠재력은 무한하다. 에라수리스는 대를 이어 그 잠재력을 찾고 발전시켜 세상에 알려왔다. 에라수리스 와인을 맛보면 칠레 와인이 걸어온 역사가 농축돼 있는 것 같다. 어떤 맛을 더 보여줄지 앞으로가 더욱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