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팔이.’ 한때 서울 용산구 용산전자상가(용산상가)에서 전자제품에 문외한인 소비자를 상대로 바가지 장사를 하던 일부 악덕 상인을 일컫는 인터넷 속어다. 하지만 이들은 인터넷 최저가 비교 판매가 일반화한 이후 거의 멸종 상태에 이르렀다. 현재 용산상가 상인은 가격과 품질로만 경쟁해 살아남은 이들이다. 실제로 용산상가에는 시중 완제품형 개인용컴퓨터(PC)에 비해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비)가 좋은 조립형 제품이 넘쳐난다. 문제는 한 번 안 좋은 쪽으로 돌아선 소비자의 인식이 쉽게 회복되지 않고 있다는 점.
7월 4일 찾은 용산상가 내 선인상가는 평일 오후인 점을 감안해도 썰렁하게 느껴질 만큼 손님이 없었다. 용산상가 내에서도 조립형 PC 판매로 특화된 이 상가의 복도는 매장에서 미처 소화하지 못해 삐져나온 물건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좁은 복도 사이로 배달원들만 돌아다녔다. 용산상가에 늦은 점심을 배달하거나 빈 그릇을 수거해가는 음식점 배달원이 간간이 보였다. 대부분은 큰 수레를 끌고 점포에 상품을 배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짐을 내려놓을 때마다 안 그래도 좁은 복도가 더 좁아졌다.
용산상가는 1987년 수도권정비계획에 따라 서울 용산구 용산역 서쪽에 있던 청과물시장이 서울 송파구 가락동으로 이전한 자리(12만900㎡)에 들어선 국내 최대 전자·전기제품 판매 상가다.
바가지 오명 쓰고, 온라인 쇼핑몰에 밀리고
용산상가는 특히 PC 판매로 입소문이 났다. ‘1인 1컴퓨터’를 뜻하는 PC 시대가 열리면서 저가 PC를 주력으로 판매하는 용산상가가 전성기를 맞은 것. 용산상가의 주력 상품은 일본, 대만 등지에서 부품을 들여와 직접 조립해 파는 조립형 PC였다. 당시 용산상가 PC 판매점들은 대형 가전업체들이 내놓는 제품에 비해 훨씬 저렴하면서 성능은 뒤처지지 않는 PC를 생산했다.그 후 용산상가는 조립형 PC 판매의 원조가 됐다. 내로라하는 유명 조립형 PC 업체들도 바로 이곳에서 출발했다. 한때 국내 데스크톱컴퓨터 시장의 ‘빅3’로 꼽히던 현주컴퓨터가 대표적 사례다. 비록 지금은 폐업했지만 현주컴퓨터는 1989년 용산상가에서 시작해 큰 인기를 얻었다. 용산상가는 공교롭게도 한국 경제에 칼바람이 불던 외환위기 때 오히려 크게 성장했다. 당시 온라인 게임 ‘스타크래프트’의 열풍이 분 데다, 정리해고자 출신 자영업자들 사이에서 PC방 개업 붐이 일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용산상가 주력 제품인 PC의 수요도 덩달아 늘어났다.
용산상가에서 20년간 영업해온 장모(52) 씨는 “1990년대 말에는 가정용 컴퓨터 하면 용산일 정도로 개인 손님이 많았다. 손님이 많으니 박리다매식 영업이 가능해 부품 가격이 요동쳐도 안정적으로 저렴한 가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2000년대부터 용산상가는 PC 판매 왕좌를 온라인 쇼핑몰에 내줬다. 가격 경쟁력에서 온라인 쇼핑몰에 밀린 것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용산상가 상인들이 제품 가격을 속여 부당 이득을 취한다는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용팔이’란 말도 함께 등장했다. 일부 상인이 PC 부품 가격을 부풀리거나 조립형 PC에 중고 부품을 넣어 판매하는 등 악덕 행위를 한 것. 이 때문에 소비자는 조립형 PC 자체에 불신을 갖게 됐다. 결국 그 반사이익은 대형 가전업체들에게 돌아갔다.
가격 경쟁력 상실과 시장의 신뢰도 추락으로 용산상가를 찾는 손님들의 발길이 끊겼다. 장씨는 “과거 일부 업체의 실수로 정직하게 장사하는 사람까지 피해를 입었다. 속일 생각이 없을뿐더러 인터넷에서 부품 가격과 제조연도까지 다 찾아볼 수 있어 속일 수도 없는데, 세간의 인식은 여전히 안 좋다”며 안타까워했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이미지가 덧입혀진 용산상가와 조립형 PC는 최근 일부 소비자 사이에서 ‘싸고 좋은 물건’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인터넷 컴퓨터커뮤니티에는 용산상가와 테크노마트의 조립형 PC가 가격이나 성능 면에서 대형 가전업체들의 PC보다 훨씬 우수하다는 것이 정설로 자리 잡았다. 테크노마트는 용산상가에서 빠져나온 조립형 PC 업체들이 대거 입주한 전자상가로, 서울메트로 2호선 신도림역과 강변역에 위치해 있다.
싸고 믿을 만한 제품으로 승부
3년 전부터 조립형 PC를 사용한다는 대학생 정모(25) 씨는 “조립형 PC가 대형 가전업체의 완제품형 PC에 비해 성능이 좋을뿐더러 가격도 싸다”고 주장했다. 정씨는 “대형 가전업체의 완제품형 PC는 범용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만들기 때문에 각 PC 사용자의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부품이 필요 이상으로 들어가 가격에 거품도 많다. 게다가 브랜드의 로열티도 가격에 합산되니, 굳이 비싼 돈 주고 완제품형 PC를 살 이유가 없다. 반면 조립형 PC는 사용자가 필요로 하는 기능에 알맞은 부품을 사용하기 때문에 저렴한 가격에 각 개인에게 적합한 PC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조립형 PC와 완제품형 PC의 가격차는 실제로 컸다. 가정에서 온라인 게임과 간단한 영상 작업이 가능한 PC가 용산상가나 테크노마트에서는 85만 원에 판매되고 있었다. 반면, 이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대형 가전업체의 PC는 인터넷 최저가를 기준으로 120만~130만 원이었다. 사무용 컴퓨터의 경우 대형 가전업체는 50만 원, 같은 성능의 조립형은 30만 원에 거래됐다.
용산상가에서 만난 인터넷 컴퓨터커뮤니티 이용자 김모(22) 씨는 “과거에는 애프터서비스(AS) 등 대형 가전업체 PC에 장점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용산상가나 테크노마트의 조립형 PC 업체들도 2년 이상 AS를 보장해 굳이 성능이 떨어지고 비싼 대형 가전업체의 PC를 사용할 필요를 못 느낀다”고 말했다. 김씨는 “컴퓨터 문외한이 PC를 처음 구매한다면 범용성이 높고 서비스센터가 많은 대형 가전업체의 PC가 적합할 수 있지만, PC 사용처가 확실하고 컴퓨터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다면 조립형 PC를 선택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말했다.
용산상가와 테크노마트의 조립형 PC 가격은 인터넷 조립형 PC 최저가와도 큰 차이가 없었다. 온라인 게임용 PC의 경우 오프라인 매장가가 85만 원, 온라인 최저가가 86만 원이었다. 문서작업과 동영상 감상이 가능한 저가형 PC의 경우 오프라인 매장가가 33만 원, 온라인 최저가가 31만 원으로 거의 차이가 없었다. 인터넷 조립형 PC는 일부 제품의 경우 AS가 되지 않는 제품도 있는 실정이다.
용산상가와 테크노마트에서 15년간 조립형 PC를 판매해온 유모(36) 씨는 “약간의 가격차가 있는 이유는 부품 수급에 따라 가격이 유동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해외에서 들여오는 부품이 많은 만큼 환율이나 부품 유통사의 재고에 따라 PC 가격이 변한다. 가격을 알아보는 시간에 따라 차이가 생기는 것일 뿐, 용산상가나 테크노마트 매장은 대부분 온라인에서도 영업 중이라 인터넷 최저가와 가격차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