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 시민의 말씀, 응답소에서 다 듣고 더 빨리 처리하겠습니다. 서울시 온라인 민원제안 통합관리시스템 응답소. 처리과정까지 신속하게 알려드려요.’
서울시청에 전화를 걸면 나오는 통화연결음(컬러링)이다. 2000년대 중반 무렵 공공기관에 도입된 컬러링은 현재 거의 모든 지방자치단체(지자체), 공기업에서 활용하고 있다. 사용 목적은 △기관의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하고 △정책을 효과적으로 홍보하며 △발신자가 전화 연결을 기다리는 동안 지루하지 않게 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컬러링은 주로 음원제작업체 또는 KT 같은 통신사가 만든다. 한 컬러링 제작업체 관계자는 “컬러링을 의뢰하는 기업이 내레이션 문구를 주면 그에 맞춰 음향을 제작한다. 요즘엔 기계적인 홍보보다 기관이나 단체 특색을 나타내는 컬러링을 선호한다. 지자체는 지역 축제나 정부 행사를 홍보하려고 수시로 의뢰하고, 기업은 컬러링 하나를 만들면 장기적으로 트는 편”이라고 말했다. 공공기관은 과연 컬러링을 의도한 대로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을까. 20여 곳의 지자체와 공기업, 정부부처에 전화를 걸어봤다.
반복되는 ‘청렴’, 뜬금없는 ‘노사정 대타협’
공공기관 컬러링은 여러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기관의 기능을 강조한 간단한 멘트다. ‘행복한 선진환경국가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환경부), ‘여성, 청소년, 가족 행복’(여성가족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 되는 동반자’(보건복지부), ‘살기 좋은 나라 기업하기 좋은 나라’(기획재정부) 등이 대표적이다.정부기관 중 일부는 똑같은 멘트를 사용한다. 박근혜 정부 초기 제작한 ‘경제혁신 3개년 계획’ 컬러링이다. ‘대한민국 경제의 새로운 틀을 만들어갑니다. 3년의 혁신으로 30년의 성장을 이끌어갈 경제혁신 3개년 계획. 국민들과 함께 만들어가겠습니다.’ 현재 산업통상자원부, 보건복지부의 컬러링에 이 멘트가 나오고, 여성가족부는 ‘일, 가정, 양육과 여성인재 활용으로 대한민국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이뤄가겠다’는 멘트를 컬러링 끝부분에 내보내고 있다.
독특한 컬러링도 눈에 띈다.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는 5월 말부터 40초 길이의 아리랑 연주를 틀고 있다. 문체부 예술국 관계자는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등 다양한 아리랑을 섞어 편집했다. 국악과 양악을 조합해 아리랑을 효과적으로 홍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체부에 전화하면 이 아리랑 연주가 흐르면서 ‘안녕하세요, 문화체육관광부입니다. 매달 마지막 수요일은 ‘문화가 있는 날’입니다’라는 홍보 메시지가 나온다. 문체부 관계자는 “중앙부처에 아리랑 컬러링을 사용해달라고 요청했고, 현재 국토교통부,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등이 쓰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컬러링이 더 많다. 기관의 특색을 효율적으로 대변하지 않는 경우다. 국토교통부에 전화하면 아리랑 연주가 흘러나올 뿐 어떠한 인사말이나 메시지도 없다. 해양수산부에서는 부처와 아무 상관없는 내용이 흘러나온다. ‘17년 만에 노사정 대타협이 이뤄졌습니다. 노사정 대타협, 우리 아들과 딸의 일자리가 만들어집니다.’
일부 지자체는 일괄적으로 ‘청렴’을 강조한다. 부산시 컬러링에는 ‘청렴’이라는 말이 8번 나온다. ‘청렴한 당신이 있어서 세상이 청렴해지네요. (중략) 당신의 청렴이 청렴한 세상, 행복한 국민을 만듭니다.’ 광주시도 ‘민주, 인권, 평화의 도시 광주. (중략) 청렴 광주 다 함께 만들어갑시다’라며 청렴을 강조하고, 대구시도 ‘대구의 정신, 이제 혁신과 청렴입니다. (중략) 대구 사람의 몸속에는 청렴의 DNA가 흐르고 있습니다’라는 멘트를 넣었다. 경북 안동시도 ‘행복 안동은 청렴에서 시작됩니다’라는 문구를 사용한다.
이들 기관이 일률적으로 ‘청렴’을 강조하는 이유는 뭘까. 국민권익위원회가 2010년 제작한 ‘청렴송’ 때문이다. 부산시 관계자는 “국민권익위원회가 ‘청렴송’을 만들어 각 공공기관에 사용할 것을 권고했고, 그 후 ‘청렴송’이 부산시의 컬러링이 됐다”고 설명했다. 광주시 관계자는 “요즘 지자체 컬러링의 대세가 ‘청렴’이다. 광주시도 국민권익위원회의 청렴송을 바탕으로 컬러링 멘트를 만들어 2015년 하반기부터 시청 전 부서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톡톡 튀는 컬러링으로 고장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지자체도 있다. 충북 괴산군의 ‘산막이옛길’ 컬러링이 대표적이다. 지역 관광지를 홍보하고자 임각수 괴산군수가 직접 작사한 트로트 곡이다. ‘산막이옛길 걷던 님이 그리워 추억 찾아 내가 왔어요. 군자산 비학봉에 두 손 모아 빌고 빌면 만나게 될까.’
매년 수천만 원 들어가는 컬러링 사업
이 노래 가사에는 ‘괴산군’이나 ‘괴산군청’이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발신자가 컬러링을 듣고 전화를 잘못 건 줄 착각할 정도지만, 괴산군은 이 곡을 자랑스럽게 홍보하고 있다. 군청 관계자는 “딱딱한 멘트보다 흥겹고 재미있게 괴산군을 홍보할 수 있고, 군수가 제작에 참여했다는 것이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전북 임실군도 지역 특산품인 치즈를 컬러링으로 홍보한다. ‘임실앤치즈피자 누구나 좋아해요. 사랑이 듬뿍 담겨 있죠. 아 맛있어.’ 남녀 성악가가 함께 부르는 ‘임실앤치즈’ 노래는 재미와 웃음을 유발한다. 임실앤치즈는 임실군이 상표권을 가진 치즈 브랜드로, 임실군의 치즈기업이 이 브랜드를 사용하려면 군청에 일정 비용을 내야 한다.컬러링 전체를 지역축제 홍보에 할애하는 지자체도 있다. ‘1300만 경기도민의 화합과 우정의 한마당 축제인 제27회 경기도생활체육대축전이 10월 14일부터 17일까지 4일간 세종인문도시 명품 여주에서 열립니다.’ 전남 장흥군도 10월 말 개최되는 장흥국제통합의학박람회를 컬러링으로 홍보하고 있다. 이 같은 정보성 멘트는 그 내용을 충분히 듣기 전 통화가 연결되기 일쑤다. ‘지역축제 홍보’라는 본래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셈이다.
아나운서 멘트 없이 노래로만 구성된 컬러링은 내용을 명확히 알기 어렵다. 한국수자원공사, 한국전력공사, 한국도로공사 등 일부 공기업의 컬러링 노래는 가사가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특히 한국전력공사의 컬러링은 ‘안전은 행복, 안전은 사랑, 안전넘버원, 안전이 제일이다’라며 ‘안전’을 강조하는데 ‘한전’과 발음이 비슷해 들을 때 헷갈릴 정도였다.
이 같은 공공기관의 컬러링 운용에는 한해 수백만~수천만 원의 비용이 발생한다. 제주시는 2015년 한 해 컬러링 43개를 제주시가 자체 제작해 총 5520만 원을 절약했다고 발표했다. 이 비용은 어떻게 산출한 걸까. 제주시 관계자는 “기존에는 KT에 의뢰해 제주시 시정을 홍보하는 컬러링을 제작했는데, 12개월 동안 전 부서에서 43개 컬러링을 쓴다고 가정했을 때 5520만 원이 든다는 계산이 나왔다. 지난해부터 제주시 내 컬러링 제작·송출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KT에 낼 돈을 아낀 것”이라고 설명했다. 컬러링 제작에는 보통 100만~200만 원 비용이 든다.
하지만 공공기관 컬러링이 본래의 목적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달성하는지는 확인된 바 없다. 여준상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일부 관공서가 컬러링을 경쟁적으로 과도하게 사용하고 있다. 컬러링은 듣는 이에게 브랜드 정체성을 전달하거나 지루한 연결음을 대신하는 청량제로 기능해야 한다. 정보를 과잉 전달하거나 천편일률적인 컬러링은 오히려 역효과를 유발한다”며 “컬러링을 홍보 도구로 사용하는 공공기관은 컬러링의 기본 목적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