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마을에서 백발의 장인(匠人)이 모든 기력을 쏟아내 만든 와인. ‘루시용(Roussillon)’ 와인을 대하면 왠지 이런 이미지가 떠오른다. 루시용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북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프랑스 남부 소도시다. 피레네 산맥 동쪽 끝자락에 자리한 이곳은 동남쪽으로 지중해가 펼쳐지고 나머지 삼면은 바위 절벽과 산자락이 에워싸고 있어 지형이 마치 원형극장처럼 생겼다. 그래서인지 루시용 와인에선 산, 바다의 맛과 향이 모두 느껴진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루시용 와인의 역사는 2700년이 넘는다. 루시용에 처음 포도를 전한 이는 그리스인이었다. 지중해에서 활발하게 무역을 하던 그리스인이 기원전 7세기 포도를 전파했고, 이후 로마가 이곳을 지배하면서 와인 생산이 활발해졌다. 루시용은 스페인과 프랑스 국경에 위치한 탓에 분쟁이 늘 끊이지 않았다. 프랑스령으로 굳어진 것은 1659년, 벌써 350년이 넘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여전히 스페인 카탈루냐 사람임을 자랑스러워하며 카탈루냐어를 쓴다.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과 루시용은 피레네 산맥을 사이에 둔 이웃이지만, 루시용 와인은 카탈루냐 와인과는 사뭇 다르다. 가장 큰 원인은 테루아르(terroir·토양)다. 산이 많으니 경사면이 많고, 경사면도 방향에 따라 햇빛을 받는 시간대가 제각각이어서 같은 포도도 다른 맛을 낸다. 흙도 화강암, 석회암, 모래, 자갈 등 다양하고, 이에 따라서도 포도 맛이 다르다. 재배하는 포도 품종도 23가지나 된다. 루시용에는 대규모 와인 생산자가 없다. 2000명 넘는 소규모 와인 생산자가 그 나름의 신념과 소신으로 와인을 만드니, 와인 하나하나가 개성이 넘친다.
아직 우리나라에 루시용 와인이 많지는 않지만 찾아서 마셔볼 만한 와인은 꽤 있다. 화이트 와인으로는 생로크(Saint-Roch) 와인을 추천한다. 생로크는 그르나슈 블랑(Grenache Blanc)에 마르산느(Marsanne)를 조금 섞은 와인이다. 파인애플 같은 열대과일향에 피망의 매콤함이 살짝 느껴진다. 바닷바람의 영향을 받은 포도로 만들어서인지 짭짤한 맛과 함께 상큼함이 돋보인다. 식전주로 좋고, 생선이나 조개 등 해산물과도 잘 어울린다. 가격은 3만 원대다.
레드 와인은 주로 시라(Syrah), 그르나슈 누아르(Grenache Noir), 카리냥(Carignan), 무르베드르(Mourvedre)로 만든다. 이 품종들은 프랑스 남부 전역에서 활발히 재배되지만, 루시용 와인은 뭔가 다르다. 레 소르시에르(Les Sorcie`res)는 블랙베리와 블랙체리 같은 베리향에 신선한 채소향이 어우러진 와인으로 마시기 편한 스타일이다. 마스 베차 엑셀랑스(Mas Becha Excellence)는 말린 육류에서 나는 쿰쿰함이 매력적이다. 여기에 잘 익은 베리향, 바이올렛향, 쇳내 같은 미네랄향, 후추의 매콤함이 뒤섞여 복합미도 뛰어나다. 레 소르시에르와 마스 베차 엑셀랑스 모두 고기요리와 잘 어울리며 가격은 4만~5만 원대다.
루시용은 프랑스에서도 유기농으로 포도를 재배하는 와이너리가 가장 많은 곳이다. 바다와 산 양쪽에서 바람이 부니 포도에 곰팡이성 질병이 발생할 위험이 상대적으로 적다. 건강한 포도로 만들어 맛 있으면서도 가격은 합리적인 루시용 와인. 프랑스의 숨은 보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