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역하청업체(하청업체) 직원의 안타까운 죽음이 잇따르는 가운데 애매한 법적책임 규정이 세계 최고 수준의 산업재해 사망률을 낳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원청기업이 책임지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가 만든 표준하도급계약서에는 전적으로 하청기업이 책임지도록 돼 있어 내용이 상충하는 것. 그러다 보니 사고만 터지면 원청-하청기업 간 책임 공방이 벌어지고, 결국 계약관계상 약자인 하청업체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
5월 28일 1명이 사망한 서울메트로 2호선 구의역 사고나, 6월 1일 4명이 사망한 경기 남양주 지하철 공사장 폭발사고의 경우 피해자는 모두 하청업체 직원. 각 사고의 원청업체는 “수사 결과를 보고 책임 여부를 판단하겠다”고 한 발 뺀 상태다. 사실 산업재해(산재)로 하청업체 직원이 사망하는 경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현대중공업에선 올해 들어서만 산업재해로 벌써 5명이 사망했고, 이 중 하청업체 직원만 3명이다.
원청 책임, 법 규정 있지만…
국내 산재 사망자는 1만 명당 53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고 수준이며 일본 20명, 독일 17명, 미국 35명, 영국 14명과 비교해도 차이가 너무 크다. 그보다 더 심각한 사실은 원청업체보다 사회적 약자인 하청업체 현장 근로자의 사망 위험이 훨씬 크다는 점. 6월 8일 더불어민주당 이용득 의원실이 고용노동부의 ‘중대재해 발생현황’ 자료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300명 이상 국내 사업장에서 산재사고로 숨진 전체 근로자 855명 가운데 하청업체 근로자는 모두 345명으로 40.4%를 차지했다. 이들 사업장에서 하청업체 근로자의 비중이 20%가량인 점을 고려하면 원청업체 근로자보다 하청업체 근로자의 산재 사망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전문가들은 하청업체 근로자가 이처럼 위험한 환경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이유로 원청업체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을 지목한다. 2015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산재 위험직종 실태조사’에 참가한 전문가 10명(직업환경의학전문의 5명, 대학교수, 변호사, 노무사, 안전보건 분야 연구원, 현장 활동가 각 1명)은 “산업재해를 줄이기 위해선 산재사고 발생 시 원청업체의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그들은 실태조사 결과를 담은 보고서에서 “사업장의 실질적 의사결정자인 원청업체의 사업주를 처벌할 수 있도록 실효성 있는 수준의 특별법이 제정되거나 기존 법을 개정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지적에도 공정위가 만든 표준하도급계약서는 안전관리 책임을 하청업체에 돌리고 있다. 공정위의 현행 건설업종 표준하도급계약서에 따르면 하청업체 측에 공사 시공과정의 안전 및 재해관리 의무가 있다. 표준하도급계약서 제45조에는 ‘수급사업자(하청업체)는 공사를 시공하면서 안전 및 재해방지를 위해 관련 법규를 준수하고 감독의무를 성실히 이행한다’고 돼 있다. 또 제14조는 ‘수급사업자는 이 계약의 책임·품질시공 및 안전 기술관리를 위해 현장 대리인을 두도록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산재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책임 공방이 뒤따르는 이유는 공정위의 표준하도급계약이 산업안전보건법상 원청업체 처벌 규정과 상충하기 때문이다. 하청업체의 재해 방지 관리 감독의무를 일방적으로 규정한 표준하도급계약서와 달리 산업안전보건법 제29조는 ‘원청업체가 추락·붕괴·화재·폭발 위험이 있는 곳 등 20곳에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재해 예방을 위해 안전보건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공정위 한 관계자는 “책임 소재가 상충하는 게 아니다. 표준하도급계약서는 권고사항일 뿐이다. 계약 시 반드시 표준하도급계약서를 사용해야 하는 법적 의무는 없다. 표준하도급계약서에 하청업체의 책임을 명기했다 해도 양쪽 회사 간 계약 문제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사고 책임을 둘러싸고 법과 업체 간 계약서 내용이 서로 상충하다 보니 원청업체는 기회만 있으면 자신들의 책임을 면탈하려고 애를 쓴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정비공 사망사고의 경우 원청기업인 서울메트로 측은 법적 책임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경찰 수사 결과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책임 여부가 어떻게 될지 아직 말하기 어렵다”며 유보적 태도를 취했다. 사고 직후인 6월 1일 정수영 서울메트로 사장직무대행이 “사고는 고인의 책임이 아닌 (서울메트로 측) 관리와 시스템의 문제”라고 시인한 것과는 온도차가 크다.
기업들, 산재사고 은폐하기 바빠
남양주 지하철 공사장 폭발사고의 원청업체인 포스코건설의 대응도 별반 다르지 않다. 경찰 수사에서 안전 관련 작업일지 조작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법적 책임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회피하고 있다. 포스코건설 한 관계자는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이다. 정확한 사고 원인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책임 여부에 대한 대답을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고용노동부는 OECD 최고 수준의 산재발생률을 줄이기 위한 한 방편으로 매년 산업재해율 및 사망만인율(노동자 1만 명당 산재로 사망하는 사람의 수)이 현저히 높은 사업장과 중대 사고가 발생한 사업장을 인터넷 홈페이지에 공표하고 있다. 이에 포함된 사업장은 2년간 정부포상이 제한되고, 그다음 해 산업안전보건 감독 대상이 되며, 산업재해보험료율도 올라간다. 가장 치명적인 대목은 여기에 이름이 올라간 업체는 각종 공사 계약과 입찰에서 엄청난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산재가 발생해도 기업은 합당한 처벌을 받고 보상을 하는 등 공적 책임을 지기보다 은폐하기 바쁘다. 산재 은폐는 현행법상 불법이다. 산업안전보건법 제10조 2항에 따르면 노동현장에서 일어나는 사망 등 중대 사고는 고용노동부에 보고하게 돼 있다. 이와 관련해 5월 고용노동부는 ‘현대건설이 한국수력원자력의 발주로 시공 중인 원자력발전소 공사현장에서 3년간 발생한, 100명 넘는 근로자의 산재를 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조사에 착수했다. 이에 대해 현대건설 측은 “고용노동부의 조사가 진행 중인 상황이라 말하기 어렵지만, 산재를 은폐한 게 절대 아니다. 경미한 사고를 (정식으로) 공상처리(회사가 산재 근로자에게 치료비와 위자료를 지급하고 합의하는 것)한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국내 기업의 산재 은폐 관행은 정부기관조차 인정한 바 있다. 2015년 국회입법조사처가 발행한 ‘산업재해 은폐에 대한 실태조사 및 제도 개선 방향’ 보고서에서 고용노동부는 “실제 산업재해가 더 많음에도 보건복지부로부터 전달받은 문서가 정확하지 않거나 인력 부족 문제로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며 산재 은폐 관행을 시인했다.
노동자들의 건강권과 산재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노동건강연대의 한 관계자는 “현행법상 노동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고는 보고하게 돼 있지만 지켜지지 않는다. 기업이 산재보험 처리가 많아지면 정부 발주 공사를 수주하는 데 불이익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