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있었던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가 한국 주식시장이나 환율에 미치는 영향은 유동적이었고, 한 주 내외가 지나면 사라지곤 했다. 이는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도 한국과 일본 경제에 별다른 구체적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다를 수 있다.’
2월 하순 미국 월스트리트의 대표적 투자은행 골드만삭스가 투자자에게 발송한 비공개 보고서는 이렇듯 도발적인 내용으로 시작한다. 제목부터 ‘한국 전망 : 고조되는 지정학적 긴장-이번에는 다를 수 있다(Korea Views: Elevating Geopolitical Tensions-This time may be different)’다. 작성자인 권구훈 골드만삭스 서울지점 수석이코노미스트는 국제통화기금 모스크바사무소 상주대표를 지내고 골드만삭스에 합류한 뒤 한반도와 북한 문제에 오랜 기간 천착해온 전문가다.
평양이 입는 타격 더 크지만…
북한의 도발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은 그간 국내 경제 및 금융 전문가들 사이에서 ‘불변의 진리’에 가까웠다. 북한의 주요 도발과 주가 변동 양상 데이터를 살펴보면, 아무리 충격적인 사건이라도 단일한 이벤트만으로는 증시에 미치는 영향이 수일 내 사그라져 원래 수준으로 회복된다는 것. 2006년 1차 핵실험과 2009년 2차 핵실험이 6일, 2010년 연평도 포격이 그나마 가장 길어서 8일이 지난 후 원래 수준으로 회복된 바 있다.이번에는 왜 다르다는 것일까. 골드만삭스 보고서는 크게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한다. 첫 번째는 바로 개성공단 가동 중단으로 대표되는 한국 정부의 강력한 대응조치와 연평도 포격 이후 달라진 한국군의 교전수칙이다. 외국인투자자 시각으로만 보자면, 이렇듯 단호한 한국 정부의 자세와 행보가 긴장이 빠른 속도로 커지는 원인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결의와 한국, 미국, 일본 등의 독자제재다. 보고서 내 북한 외환수지는 대표 수출품인 석탄과 철광의 국제가격 하락으로 이미 하락 추세에 있었다. 여기에 개성공단 폐쇄와 관광수입 감소가 맞물리면서 2016년 북한 외환수입은 4억6000만 달러(약 5400억 원) 이상 감소하리라는 것. 이 가운데 경제제재에 따른 감소 예상분만 2억7600만 달러(약 3200억 원)에 이른다. 북한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3%에 달하는 수치다.
문제는 이러한 북한 경제상황 악화가 만들어낼 파급 효과다. 보고서는 한반도 긴장 국면이 장기화할 경우 원화가치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현재는 1200원 안팎을 오가는 원-달러 환율이 장기적으로는 1300원까지 갈 공산이 크고, 지정학적 위험이 커진다면 이보다 더 높게 치솟을 수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한반도 상황이 불안정해질 수 있다는 외국인투자자의 판단이 굳어지면서 한국 시장의 매력이 감소하고 그에 따라 원화 수요도 떨어질 수 있다는 얘기. 물론 남북한 경제의 엄청난 격차를 생각하면 북한이 입을 충격이 훨씬 크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중국 경제의 성장 둔화 등 이미 한국 시장에 드리워진 부정적 요인과 맞물릴 경우 남한 경제가 입을 내상도 만만치 않으리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문서가 2012년 2월 삼성경제연구소가 작성한 보고서다. 외국인 투자자의 상장주식 투자가 자유화된 1998년부터 2010년까지 북한발(發) 주요 사건 10개를 선정해 사건별 충격 강도와 주가 변동 양상을 측정한 이 보고서는, 한국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이 커지는 가장 중요한 변수로 ‘연쇄성’을 꼽는다. 단일한 사건이 얼마나 큰 충격을 줬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그 대신 남북한과 주변국의 대응이 맞물리면서 긴장이 장기간 상승효과를 일으킬 때 부정적 파급 효과가 더 크다는 결론이다. 특히 도발→강경 대응→추가 도발이라는 악순환 고리가 형성될 조짐이 나타나면 국내외 투자자의 심리가 급격히 냉각된다는 것. 국민과 투자자의 의식 속에 내재화된 기대 수준을 넘어서는 충격이 계속해서 발생한 경우에는 주가 폭락의 연쇄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는 설명도 이어진다. 최근 상황에 대한 골드만삭스 보고서의 결론을 뒷받침하는 근거인 셈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구조화
익명을 요청한 한 국내 대기업의 전략 담당 고위 관계자는 “그간 한국 경제가 북한의 반복되는 도발에 상당한 내성을 축적해온 게 사실이지만, 반대로 바닥에 깔린 지정학적 영향은 쉽사리 눈에 띄지 않게 만드는 측면도 있다”고 말한다. 안보 정세가 경제 성적 전반에 족쇄로 작동하는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는 국제금융시장의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 만성화한 만큼 이에 쏟는 관심 역시 높지 않지만, 1월 이후 상황처럼 강 대 강 대치 국면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면 외국인투자자의 심리 역시 구조적으로 악화될 개연성이 있다는 설명이다.‘꼬리 위험(Tail Risk).’ 최근 한반도 정세가 한국 경제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총평하며 골드만삭스 보고서가 사용한 말이다. 정규분포곡선의 양쪽 끝이 꼬리처럼 얇고 길게 늘어져 있는 모습에서 나온 이 통계학 용어는, 발생 가능성 자체는 높지 않되 일단 현실화되고 나면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의 엄청난 파국을 유발하는 위험요인을 가리킨다. 상황이 장기화할수록 위험이 더 커진다는 사실은 불문가지. 2012년 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가 ‘북한발 위기가 발생했을 때 체감 충격을 시간적으로 분산시키고 물리적으로 경감할 수 있는 정부의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결론 내린 이유도 마찬가지다. 확고한 대응과 효과적인 사후수습으로 연쇄 도발을 막는 한편, 도발→강경 대응→추가 도발의 악순환 고리가 작동하지 않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제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