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검사외전’이 2월 11일 기준 600만 관객 동원에 성공했다. 배우 황정민으로서는 ‘베테랑’에 이어 흥행 영화의 주역임을 입증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바로 강동원이다. ‘검사외전’이 개봉되기 전만 해도, 이 영화는 검사 역을 맡은 황정민의 작품으로 기대를 모았다. 제목이 암시하듯, 영화 주인공은 다혈질 정의파 검사 역을 맡은 황정민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과연 강동원은 어떤 배역을 맡았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은 하나같이 ‘검사외전’을 황정민의 영화가 아니라 강동원의 영화로 평가한다. 그렇다면 ‘검사외전’의 강동원은 지금까지의 강동원과 다르다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르다. 한국 영화에서 ‘강동원 활용법’을 보자면 대표적으로 두 작품을 들 수 있다. 하나는 그의 출세작이라고도 할 수 있을 ‘늑대의 유혹’이고, 다른 하나는 ‘군도 : 민란의 시대’다. 귀여니의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늑대의 유혹’에서 강동원은 우산을 들어 얼굴을 살짝 내미는 것만으로 젊은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인물이었다. ‘군도 : 민란의 시대’의 조윤 역시 분명 악역이지만 그의 악행보다 관객을 압도한 것은 풀어헤친 머리의 비현실적 아름다움이었다.
뻔한 복수극에 생기를 불어넣다
절대적인 아름다움, 이는 배우 강동원의 매우 뛰어난 장점이지만 한편으로는 단점이기도 했다. 강동원이 등장한 영화에서 그는 늘 그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하나의 피조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그것을 알아본 이명세 감독은 ‘형사 Duelist’에서 강동원의 아름다움을 대사 하나 없이, 검술을 뽐내는 수려한 미장센으로 구체화한 바 있다. 그는 이처럼 존재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오브제로서 자리매김해왔던 것이다.그런 그가 조금씩 다른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 건 듀오 연기를 펼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강동원이 등장한 영화 가운데 인상적인 작품은 대개 배우 2명이 주연을 맡은 것들이다. 이나영과 호흡을 맞췄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그중 하나다. 강동원은 이 영화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을 언도받은 죄수로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 강동원은 처음으로 부산 사투리를 쓰는데, 서글픈 사연을 지닌 수감자라는 설정은 도시적이고 세련된 그의 외모 아래 숨겨진 그늘을 또 다른 면모로 부각했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부산 출신의 자연스러운 사투리도 연기에 시너지 효과를 선사했다. 외모뿐 아니라 다른 면모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송강호와 함께 주연을 맡은 장훈 감독의 ‘의형제’는 강동원의 새로운 가능성과 면모를 충분히 입증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강동원은 송강호에 밀리지 않는 연기를 보여줌으로써 기대 이상의 흡입력을 보여준다. 돌이켜보면 강동원은 한국에서 가장 유력한 남성 배우 거의 대부분과 듀오 연기를 한 몇 안 되는 젊은 배우 가운데 하나다.
58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검은 사제들’ 역시 마찬가지다. 김윤석, 박소담, 강동원 이렇게 단 3명의 배우가 후미진 골목의 좁은 방 안에서 30분 넘게 펼치는 엑소시즘은 지금까지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긴장감과 박진감을 선사했다. 어둠과 밝음이 혼재하는 강동원의 개성은 아픈 과거를 지닌 사제의 이미지를 배가했고, 수려한 외모와 지적인 면모 역시 영화의 비장감을 높였다. 심지어 강동원이 입었던 수단은 지금까지 우리가 봐온 성직자의 옷과 뭔가 다른 것이 아닐까라는 감탄까지 자아냈다.
분명 강동원에게는 큰 키와 한국인에게서 보기 드문 비율이 주는 혜택이 있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단순히 자신의 세련된 외모에 부합하는 연기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 반하는 연기에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검사외전’은 바로 이러한 강동원의 전략이 잘 녹아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검사외전’에서 강동원이 맡은 역은 사기 전과 10범의 꽃미남 사기꾼 한치원이다. 그는 억울하게 살인죄를 쓰고 15년을 언도받은 검사 변재욱(황정민 분)을 대신해 그의 복수를 도와준다. 서사적 비중으로 보자면 한치원, 그러니까 강동원은 주연 변재욱을 도와주는 조력자다. 하지만 그가 등장함으로써 조금은 뻔한 복수극이던 ‘검사외전’은 다른 빛깔의 생기를 띠게 된다.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자가 가해자에게 응당한 처벌을 돌려주는 것, 사실 이러한 복수서사는 ‘검사외전’만이 가진 개성적 이야기라고 보기 어렵다. 이미 1000만 관객을 동원한 ‘베테랑’이나 ‘내부자들’이 다룬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검사외전’이 ‘베테랑’이나 ‘내부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강동원이 맡은 한치원이라는 캐릭터에서 빚어진다.
한치원은 그다지 정의롭지도, 대단히 윤리적이지도 않다. 그는 잘생긴 외모와 화려한 말재간으로 부잣집 여자들이나 유혹하는, 그렇고 그런 삼류 인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한치원-강동원은 사회 정의나 사필귀정 같은 대의명분을 주장하는 영웅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소박한 이익을 추구하는, 소시민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두려움 없이 나아가는
흥미로운 점은 이 초라한 소시민 역을 맡은 강동원이 영화의 재미를 견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서울대 법대 과점퍼를 걸치고 유유히 걸을 때 그와 눈길을 마주치며 쑥스러워하는 여성이나, 거액의 돈을 인출하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은행원의 에피소드들은 한국 사회의 어떤 면을 고발하는 한편, 그가 곧 강동원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개연성을 확보한다. 눈에 보이는 것에 사족을 못 쓰는, 그리고 그 보이는 것만으로 사람을 판단해버리는 한국 사회의 못난 그림자가 그럴듯한 블랙 코미디로 재해석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검사외전’은 지금까지 한국 영화가 한 번도 사용해본 적 없는, 강동원의 또 다른 면모를 십분 활용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사기를 치기 위해 여성에게 키스를 퍼붓는 장면이랄지, 중학교 수준의 영어로 외국 교포 행세를 하는 모습, 위기에 몰려 임기응변식으로 아무 거짓말이나 둘러대는 모습 등은 이제까지 강동원에게서 볼 수 없던 새로운 면모다. 삼류 양아치 역을 전담하다시피 했던 류승범이나 하정우에게 특화됐던 뒷골목 남자 색깔이 강동원에게서 발견되는 순간, 그는 만화 속 비현실적 주인공에서 꽤나 그럴듯한 현실적 남자로 다가온다.
결국 ‘검은 사제들’과 ‘검사외전’의 잇따른 성공은 강동원의 선택이 옳았음을 보여준다. 그 선택은 자신의 지배적인 이미지를 거듭 배신하며 새로운 면모를 향해 나아가는 자기부정의 길이기도 하다. 대단한 배우들과의 협업에 겁내지 않고, 자신의 장점을 무너뜨려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데 주저하지 않는 것, 그것은 곧 배우로서 강동원이 스스로를 꽤나 엄격하게 단련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으로, 다음 작품에서 그를 또 만날 수 있을 거라 믿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