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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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드라마 ‘리멤버’와 과잉기억증후군

원주율, 법전 줄줄 외는 건 서번트증후군에 가까워…‘망각’ 사라지면 더 불행할 수도

  • 이우상 동아사이언스 기자 idol@donga.com

    입력2016-01-18 11: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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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랑 우리 형 죽는 모습이 방금 전 일어난 일처럼 난 아직도 생생해. 머릿속에서 절대로 사라지지가 않는다고!”
    SBS 드라마 ‘리멤버-아들의 전쟁’의 주인공 서진우(유승호 분)는 어린 시절 당한 교통사고 순간을 잊지 못한다. 과거 일어난 모든 사건을 시간, 장소까지 세밀하게 기억하고 결코 잊지 못하는 ‘과잉기억증후군(hyperthymesia)’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진우에게 시련이 닥친다. 치매로 기억을 잃은 아버지(전광렬 분)가 살인 누명을 쓰게 된 것. 진우는 아버지의 무죄를 증명하고자 자신의 기억 능력을 총동원한다.
    이 드라마에서 진우가 가진 과잉기억증후군은 의지와 관계없이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증상으로 묘사된다. 이런 능력 덕에 진우는 원주율을 술술 외울 뿐 아니라 사법시험을 간단히 통과해 최연소 변호사가 된다. 이동우 상계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과잉기억증후군이 실제로 존재하는 질환은 맞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를 가진 사람이 드라마 내용처럼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본인이 경험한 사건들을 ‘에피소드’ 위주로 세밀하게 기억할 뿐이다. 학계에서 과잉기억증후군은 지나간 자서전적 경험을 세밀한 내용까지 잊지 못하고 기억하는 증상을 뜻한다.



    과거와 현실 동시에 사는 존재

    사상 최초로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진 것으로 인정된 미국 여성 질 프라이스(50)의 사례는 이 질환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프라이스는 14세가 된 어느 날부터 살아온 모든 날을 기억할 수 있게 됐다. 그에 대한 논문에 따르면 몇 년 몇 월 몇 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짚을 필요조차 없이 바로 떠올릴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제임스 맥거프 미국 캘리포니아 어바인대 교수팀이 수행한 연구에서 프라이스는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막을 방법이 없다”며 “눈앞의 현실을 보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과거 영상이 흘러가 마치 TV 화면에서 여러 채널을 동시 시청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밝혔다. 김성찬 서울탑마음클리닉 원장(정신과 전문의)은 이에 대해 “과잉기억증후군은 일반인이 가진 ‘망각’이라는 중요한 능력이 결핍된 것으로, 부러운 능력이라기보다 때로는 괴로움을 겪을 수 있는 증상으로 봐야 한다”며 “과거를 잊지 못하고 계속 상기하는 것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와 유사한 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과잉기억증후군이 있다고 해서 드라마에서처럼 한 번 스치듯 보는 것만으로 원주율을 수백 자리까지 줄줄 외우거나, 법전을 달달 외울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이동우 교수는 “시험 문제를 풀기 위해 강의 시간을 떠올리면 강의 내용보다 그때 있었던 사건들이 자세하게 기억나는 식”이라고 밝혔다. 프라이스 역시 학업 능력이나 암기 능력은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드라마 ‘리멤버’에서 진우가 보이는 모습은 과잉기억증후군보다 ‘서번트증후군(savant syndrome)’ 쪽에 더 가깝다는 의견도 있다. 서번트증후군이란 자폐증을 가진 사람 가운데 일부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으로(통계에 따르면 10명 중 1명꼴), 일반인에 비해 매우 뛰어난 암산 능력, 암기 능력 등을 보이는 것을 가리킨다. 기억에 의존해 매우 정교한 풍경화를 그리는 스티븐 윌트셔, 2만 자리 이상의 원주율을 외운 대니얼 태멧 등이 이 증상을 가진 유명인이다. 하지만 김성찬 원장은 “원주율 암기 분야에서 유럽 기록을 가진 태멧조차 원주율 시험을 보기 전 3개월 이상 몰두해 암기하는 과정을 거친다”며 “보는 것들을 족족 사진처럼 암기하는 드라마 속 진우의 능력은 현실적인 수준을 초월해 있다”고 설명했다.



    진우의 뇌는 일반인과 어떻게 다를까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진 프라이스의 사례를 최초로 학계에 보고했던 맥거프 교수팀은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진 사람의 뇌와 일반인의 뇌가 어떻게 다른지를 2012년 학술지 ‘학습과 기억의 신경생물학(Neurobiology of Learning and Memory)’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먼저 자신이 과잉기억증후군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는 지원자 500명을 모은 뒤, 각종 기억력 테스트를 통해 고득점을 얻은 최상위 11명의 뇌를 자기공명영상(MRI)을 이용해 일반인의 뇌와 비교했다. 그 결과 이 11명의 뇌 가운데 기억력과 관련 있다고 알려진 부분(관자이랑과 측두극), 집중력과 관련 있다고 알려진 부분(두정하구) 등의 회백질 부피가 일반인과 차이가 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용 KAIST(한국과학기술원)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일반인과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진 사람의 뇌를 비교하니 총 9곳에서 차이점이 발견됐다”며 “이 밖에도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진 이는 전두엽과 측두엽을 연결하는 백질 부위가 일반인보다 더 튼튼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위 연구에 제1 저자로 참여한 오로라 르포트 미국 캘리포니아 어바인대 연구원은 “앞으로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진 사람이 기억을 저장하는 방법과 다른 어떤 요인이 이 같은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등을 연구할 예정”이라 밝혔다.
    눈여겨볼 것은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진 사람의 기억이 모두 진실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엘리자베스 로프터스 미국 캘리포니아 어바인대 교수 연구팀은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진 사람도 보통 사람처럼 ‘거짓 기억’을 진짜 기억으로 믿고 착각할 수 있다는 내용의 논문을 2013년 12월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했다. 거짓 기억이란, 어린 시절 사진을 보고 상상을 통해 마치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처럼 느끼는 현상처럼 외부에서 주입된 기억을 말한다.
    연구팀은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진 것으로 확인된 20명을 대상으로 소매치기, 절도 등의 사건이 담긴 사진을 연달아 보여준 뒤, 사건과 관련된 진짜 사실과 가짜 내용을 담은 텍스트를 보여주는 실험을 했다. 그 결과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진 참가자들은 일반인과 비슷한 수준으로 실제와 거짓을 헷갈려 하며 가짜 기억을 형성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팀은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진 사람을 잘못된 정보로 헷갈리게 하지 않으면 한 번 기억한 것을 언제든 거의 완벽하게 다시 떠올릴 수 있지만, 헷갈리는 정보를 함께 주면 일반인처럼 기억이 오염될 수 있다”고 밝혔다.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절대적 기억력으로 고난을 헤쳐나가는 ‘리멤버’ 속 진우의 모습을 보면 그의 능력이 부러울 때가 있다. 김성찬 원장은 “셜록 홈스가 사용하는 ‘마음속 궁전(mind palace)’ 같은 기억술을 훈련하는 등 후천적인 노력을 기울이면 일반인도 타고난 기억력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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