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주도한 ‘2022 공급망 장관회의’가 7월 20일 온라인 화상으로 진행됐다. [외교부]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이 7월 19일 서울 강서구 마곡동에 위치한 LG사이언스파크를 방문해 프렌드 쇼어링의 중요성을 강조한 내용의 일부다. ‘프렌드 쇼어링(friend-shoring)’은 친구(friend)와 기업 생산시설(shoring)의 합성어로,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과 파트너들끼리 공급망을 구축한다’는 뜻이다. 프렌드 쇼어링의 목표는 중국, 러시아 등 미국과 다른 가치관을 지닌 국가들이 핵심 원자재, 기술 또는 제품의 시장 우위를 부당하게 활용해 미국과 동맹국들의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는 행위를 막는 것이다. 옐런 장관은 “미국은 공급망 취약성을 혼자서는 절대 해결하지 못한다”면서 “동맹국, 파트너와 프렌드 쇼어링을 구축해 공급망을 강화하고 경제성장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맹국·파트너들과 공급망 구축, 프렌드 쇼어링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이 7월 19일 LG사이언스파크에서 프렌드 쇼어링을 강조하고 있다. [사진 제공 · LG화학]
미국 정부는 7월 19일과 20일 프렌드 쇼어링 체제 전략의 일환으로 글로벌 공급망 포럼을 온라인 화상으로 개최했다. ‘2022 공급망 장관회의’에는 한국, 일본,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캐나다, 멕시코, 호주, 싱가포르, 인도, 인도네시아, 브라질, 콩고민주공화국(DR콩고) 등 17개국과 유럽연합(EU)이 참여했다. 미국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과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이 주재한 이 회의에서 참가국 대표들은 ‘글로벌 공급망 협력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참가국들은 성명에서 “팬데믹, 전쟁, 분쟁, 극단적 기후 영향, 자연재해 등에 대응하기 위해 각국 정부와 민간기업이 협력해 공급망을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참가국들은 또 원자재·중간재·완제품과 관련해 신뢰할 수 있는 공급망을 구축하고자 △투명성 △다변화 △안전성 △지속가능성 원칙에 합의했다.
이번 공동성명에서 주목할 점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에 따른 의무 이행의 중요성을 인식한다면서 공급망에서 강제노동 근절을 위해 협력한다는 내용을 포함했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을 겨냥한 부분이다. 미국 정부는 6월 21일부터 중국 신장웨이우얼(위구르)자치구에서 생산된 모든 제품의 수입을 전면 금지하는 내용을 담은 ‘위구르족 강제노동 금지법’을 시행하고 있다. 미 국무부는 “미국과 동맹국, 파트너들이 단기적인 공급망 혼선 대응에 협력한다는 정치적 약속을 했다”며 “고도의 환경·노동 기준을 충족하면서 투명하고 다각화한 장기 공급망의 탄력성 구축에도 협력하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美·中 반도체 패권 장악 총력전
미국의 프렌드 쇼어링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은 반도체다. 미국은 한국·대만·일본을 묶어 이른바 ‘칩(chip)4 동맹’을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추진 중이며, 이미 3월 각국 정부에 동맹 결성을 제안했다. 미국 측 전략은 반도체 4개국의 협력을 강화해 중국 반도체산업에 타격을 주고 주도권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반도체 설계 기술 분야에서 세계 최고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 최강자다. 대만은 파운드리(위탁생산) 분야에서 세계 1위, 일본은 소재·부품·장비 분야 강국이다. 반도체는 바이든 대통령이 “21세기 편자의 못”이라고 말한 것처럼 자동차와 각종 가전제품은 물론, 첨단산업과 무기, 군수산업 등에 사용되는 필수품이다. 반도체는 기업 간 경쟁을 넘어 각국의 기술 패권 경쟁에서도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미국과 중국은 ‘기술 냉전(Tech Cold War)’에서 승리하기 위해 반도체 패권 장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이 칩4 동맹을 구축한다면 중국의 ‘반도체 굴기’ 전략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다.중국 정부는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로 높인다는 목표를 세우고, 반도체산업에 엄청난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중국 반도체산업은 급속도로 성장 중이며, 지난해 전 세계에서 매출이 가장 빠르게 늘어난 반도체 기업 20곳 중 19곳이 중국 기업인 것으로 나타났다. 2020년 20대 기업 중 8곳이 중국 기업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성장세가 더 빨라진 셈이다. 또한 중국은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각종 장비도 대거 수입하고 있다. 지난해 중국의 반도체 장비 수입액은 296억 달러(약 38조8000억 원)로 전년 대비 58% 증가해 2년 연속 세계 최대를 기록했다. 중국은 올해 1분기에도 전년 동기 대비 27% 늘어난 75억7000만 달러(약 10조 원)어치 장비를 수입했다. 중국에 기반을 둔 반도체 기업의 지난해 총매출은 1조 위안(약 193조8300억 원)으로 전년 대비 18% 증가했으며 지난해 중국 전체 반도체 생산량은 3594억 개로 전년 대비 33% 늘어났다.
빠른 성장세만큼 중국의 반도체 기술 수준도 높아지고 있다. 현재 한국과 중국의 낸드플래시 기술 격차는 2년 정도로 추정된다. 팹리스(반도체 설계) 분야에서는 중국의 시장점유율이 9%로 미국·대만에 이어 세계 3위인 반면, 한국의 시장점유율은 1%로 크게 뒤져 있다. 파운드리 분야에서도 추격이 거세다. 시장조사 전문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전 세계 파운드리 시장에서 SMIC·화훙반도체·넥스칩 등 중국 기업의 점유율은 10.2%로, 2위 삼성전자(16.3%)와 격차가 6.1%p에 불과하다.
대(對)중국·홍콩, 반도체 수출액 전체 60%
중국 시안에 위치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전경. [사진 제공 · 삼성전자]
하지만 국제 반도체 전문가들은 기술력 싸움인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미국이 주도하는 칩4 동맹에서 빠질 경우 한국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가장 많은 기술과 특허를 보유한 미국과 반도체 동맹을 강화해 기술력을 더욱 키우는 것이 미래 한국의 ‘생존비결’이라는 얘기다. 제임스 루이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수석 부소장 겸 전략기술연구국장은 “한국은 미국·일본·대만과 협력을 강화해 혜택을 볼 수 있다”면서 “미국은 기술력 강화를 위한 합법적 경쟁과 성장을 위해 칩4 동맹을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루이스 부소장은 “중국은 현재로선 반도체를 대량생산할 수 없어 한국산 반도체 구입을 중단하겠다고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며 “한국은 중국 반도체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활용해 맞서라”고 조언했다. 21세기 기정학(技政學·tech-politics) 시대를 맞아 한국 반도체가 어떤 선택을 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