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웅(왼쪽), 영탁. [사진 제공 · TV조선]
트로트 세상이다. 거의 모든 방송 프로그램에서 트로트를 부른다. 각종 음원사이트 차트를 장식한다. 젊은 세대가 트로트를 듣고 40, 50대 중장년층이 열광한다.
그 중심에 ‘미스터트롯’이 있다. 임영웅, 영탁, 이찬원 등 젊은 트로트가수를 탄생시키며 종합편성채널(종편) 사상 최고 시청률(35.7%·이하 닐슨코리아 기준)을 세운 데 이어, 현재도 ‘트롯맨’ 7인이 출연하는 ‘신청곡을 불러드립니다-사랑의 콜센타’로 시청률 고공행진(4월 30일 21%)을 이어가고 있다. 임영웅의 신곡 ‘이제 나만 믿어요’, 영탁의 ‘찐이야’, 이찬원의 ‘진또배기’가 각종 차트를 석권하며 인기몰이 중이다. SBS 예능프로그램 ‘트롯신이 떴다’는 ‘트로트 세계화’를 표방하며 남진, 주현미, 장윤정, 설운도, 김연자 등 중견가수들이 베트남 등 해외를 돌면서 트로트를 널리 알리고 있다. 비주류 트로트가 종편은 물론이고 공중파, 유튜브를 장악해 주류 음악이 됐다.
트로트 열풍을 몰고 온 진원지는 지난해 방송된 ‘미스트롯’. 송가인, 홍자 등을 발굴한 이 프로그램은 당시 예능프로그램으로는 드물게 높은 시청률(18.1%)을 기록하며 불을 지폈다. ‘국민 MC’ 유재석도 트로트가수 ‘유산슬’로 변신해 트로트 열풍을 전 세대로 확장하는 데 일조했다.
트로트(trot)는 ‘4분의 4박자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 대중가요의 한 장르’다. 하지만 ‘뽕짝’으로 불리며 ‘나이 드신 어르신이나 듣는 촌스러운 노래’쯤으로 여겨졌다. 젊고 도시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구시대 유물, 그야말로 ‘흘러간 노래’였다. 그런 트로트가 패자가 부활하듯 지금 널리 불리고 있다.
트로트가 새삼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젊고 세련된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 팝, 랩, 혹은 화려한 율동 등으로 변주된 트로트에 젊은 세대가 크게 호응했기 때문이다. 트로트가 새롭고 다양한 형식으로 진화하자 전 세대가 공감한 것이다. 1976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최헌의 ‘오동잎’ 등 트로트와 록이 혼합된 ‘트로트 고고’가 유행한 것처럼 이번엔 발라드, 팝 등과 변주된 트로트가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트렌드인 뉴트로(New+Retro·새로움과 복고를 합친 신조어) 현상이라는 해석도 있다.
신인 가수들의 공감 확산력
하지만 더 중요한 요인은 우리 국민의 심정 저변에 흐르는 정서인 한(恨)과 흥(興)의 가락을 소환해내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크게 드러나지 않아도, 얼핏 사라진 것 같아도 여전히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한 많고 흥 많은’ 우리 정서의 한구석을 건드린 것이다. 여기에 더해 어려운 경제에 대한 불안감과 불확실성, 코로나19로 인한 ‘집콕’ 문화가 안방 TV를 가까이하게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임영웅이 부른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는 인생의 고락과 가족의 애환을 함께한 아내를 떠나보내는 심정을 임영웅의 장기인 호소력 있는 목소리에 발라드 형식으로 담아냈고, 영탁은 ‘막걸리 한잔’에서 시원하게 터져 나오는 창법으로 고단한 삶을 잊게 하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 아이돌 같은 외모에 구성진 목소리를 가진 이찬원 역시 ‘진또배기’로 20대 여성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13세 정동원이 부른 ‘희망가’와 ‘보릿고개’를 듣고 지난 세월 고달픔과 어려움을 추억하는 부모가 많았을 테고, 자녀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공감했을 것이다. 이 같은 정서의 공유는 현란하고 빠르며 스펙터클한 케이팝(K-pop)에선 느낄 수 없다. 트로트가 서민의 정서와 애환을 대변하는 대중음악임을 입증한 것이다. 손민정이 책 ‘트로트의 정치학’에서 표현한 대로 ‘트로트는 3분의 인생 드라마, 인생의 쓴맛을 모르는 사람은 진정 느낄 수 없는 음악, 꺾어 넘어가는 창법처럼 굴곡 있는 인생을 극복해가는 한국인의 끈기를 담은 음악, 슬프고도 흥겨운 음악’인지도 모른다.
트로트 열풍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트로트가 산업으로 발전하고 국민 음악으로 새롭게 거듭나려면 어떤 조건들을 충족해야 할까. 우선 여타의 문화 콘텐츠 산업이 그렇듯 사람에 대한 투자가 선행돼야 한다.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지만 그렇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개인의 창의력이 관건이다. 트로트를 잘 부르는 가수와 실력 있는 작사가, 작곡가가 그 첫 번째 활성화 조건이다. 우수한 작사가, 작곡가가 곡을 만들어 가창력 있는 가수가 이른바 ‘히트곡’을 내야 한다. 설하윤, 요요미, 조명섭 등 가창력 있는 트로트 신예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히트곡이 없는 게 약점이다. 젊고 현대적인 감각을 가진 가수가 감동적인 가사와 노래로 청중에게 감동을 줘야 한다. 이번에 발굴된 임영웅, 영탁, 이찬원, 김호중, 정동원, 장민호, 김희재 같은 다양하고 젊은 가수들이 히트곡을 내 시장 파이를 키워야 한다.
투자, 제작 유통의 선순환 기대
신곡은 과거 사례에서 봤듯이 정통 트로트가 아닌, 뭔가 새로운 것을 가미한 변주된 노래면 좋을 듯하다. 이를테면 임영웅의 ‘이제 나만 믿어요’는 그의 장점을 살린 발라드풍의 트로트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영탁의 ‘찐이야’도 경쾌한 리듬에 쉬운 가사가 귀에 쏙쏙 들어온다는 것이 장점이다. 성악을 전공한 김호중의 신곡 ‘나보다 더 사랑해요’는 클래식한 발라드풍의 노래로 인기다. 이처럼 트로트의 진화 방식은 젊고 새롭고 다양하면 더 좋을 것이다.
트로트가 산업으로서 모양을 갖추는 일도 중요하다. 아직까지도 국내 트로트시장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알려지지 않은 크고 작은 전국 지방 행사가 많고 스타급 소수 가수 외엔 발표되는 신곡들이 거의 묻히는 실정이다. 트로트의 낙후성은 고속도로 휴게소 등지에서 듣던 뽕짝 리듬의 ‘고속도로 테이프’가 잘 방증하는데, 이 같은 주먹구구식의 방식으로는 트로트 산업화가 요원하다.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그동안 트로트가 저속한 왜색 ‘뽕짝’이고 꺾는 창법만 있는, 음악성과는 거리가 먼 노래로 치부돼왔기 때문이다. ‘엘리지의 여왕’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조차 왜색을 이유로 한때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이제 트로트도 방송, 영화 등 다른 엔터테인먼트 산업처럼 투자·제작·유통·소비의 산업적 선순환 구조가 정립돼야 한다. 쉽게 말해 투자한 돈이 어떤 제작·유통 경로를 거쳐 손익이 났는지가 투명해져야 하는 것이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산업 시스템을 갖춰야만 투자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특히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하이 리스크, 로 리턴(High Risk, Low Return)’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때 더 합리적이고 산업적인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이 풍진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니 희망이 족할까’라는 ‘희망가’ 가사처럼 예나 지금이나 우리 국민의 아픔과 시름, 절망을 위안하는 음악으로 트로트만 한 게 없다. 그러니 좋은 가수가 오랫동안 트로트를 부를 수 있는 생태계가 조성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