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강호 “배우들이 미국배우조합상(SAG) 앙상블상 받았을 때 봉 감독이 더 기뻐해”
‘기생충’ 기자회견에서 플래시 세례에 환한 미소로 답하는 봉준호 감독.[사진=박해윤 지호영 기자]
기자회견에 앞서 주최 측은 ‘기생충 해외영화제 초청 & 수상 기록 정리’라는 제목의 인쇄물을 나눠줬다. A4 용지 6장 분량의 그 자료에는 제72회 칸영화제(황금종려상), 제66회 시드니영화제(최고상), 제72회 스위스 로카르노영화제(엑설런스 어워드 송강호), 제77회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외국어영화상), 제26회 미국배우조합상(SAG·앙상블상), 제17회 미국시네필협회상(앙상블상, 각본상, 미술상)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수상 기록이 깨알 같은 글씨로 채워져 있었다. 한 영화로 이렇게나 많은 수상 소식을 전한 봉 감독에게 그동안 쌓인 궁금증을 던졌다.
열정과 팀워크로 6개월간 오스카 강행군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캠페인 기간 내내 코피를 쏟을 정도로 열정을 바친 배우 송강호와 봉준호 감독.[사진=박해윤 지호영 기자]
“후보에 오른 영화들이 오스카 캠페인을 열심히 한다. ‘기생충’ 배급을 맡은 곳이 역사가 짧은 북미의 중소배급사다 보니 송강호 선배님과 함께 코피 흘릴 일이 많았다. 인터뷰만 600건 이상 진행하고, 관객과 대화도 100회 이상 가졌다. 부족한 부분을 열정으로 메웠다고나 할까. 물량의 열세를 팀워크로 커버했던 기억이 난다. 한때는 바쁜 창작자들이 일선에서 벗어나 많은 예산을 들여 영화를 알리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는데 직접 그 과정에 참여해보니 작품을 밀도 있게 검증하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캠페인 기간에 오스카를 ‘로컬’이라고 표현해 큰 화제를 모았다. 오스카를 자극하기 위한 의도적인 도발이었나.
“내가 뭐라고 도박씩이나 하겠나.(웃음) 대화 도중에 자연스럽게 나온 발언이었다. ‘아카데미는 미국 중심’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보니 (내 말을) 미국 젊은이들이 트위터에 많이 올렸나 보더라.”
-‘기생충’은 국내에서 1000만 고지를 넘었고, 오스카 후광 없이도 프랑스, 베트남, 일본, 영국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북미에서도 아카데미 시상식 전에 이미 2500만 달러(약 298억 원) 이상 매출을 올리는 등 외국어 영화로는 역대급 기록을 세웠다. 빈부격차를 다룬 다른 영화들에 비해 ‘기생충’이 유독 국내외에서 모두 폭발적인 인기를 끈 이유가 뭘까.
“‘괴물’ 때는 괴물이 한강을 뛰어다녔고, ‘설국열차’ 때는 미래 열차가 다녀 현실과 괴리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우리 이웃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를 배우들이 환상적인 앙상블로 뛰어나게 표현해 현실적인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 지점이 큰 폭발력을 발휘한 것이 아닌가 싶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
아카데미 시상식 4관왕을 비롯해 각종 수상 기록이 새겨진 ‘기생충’ 포스터.[사진=김지영 기자]
“(그 말을 패러디 소재로 활용한) 유세윤 씨는 참 천재적인 것 같다. 문세윤 씨도 최고 엔터테이너고. 오늘 아침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편지를 보내왔다. 요약하자면 ‘그동안 수고했고, 이제는 쉬어라. 그 대신 조금만 쉬어라. 나도 그렇고 차기작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는 내용이었다. 무척 영광이었고 감사했다.”
-‘번아웃 증후군’(어떤 활동이 끝난 후 심신이 지친 상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2017년 ‘옥자’를 끝내고 번아웃 증후군 진단을 받았는데 ‘기생충’을 너무 찍고 싶어 영혼의 에너지까지 긁어모았다. 곽 대표님과 ‘기생충’ 얘기를 처음 한 게 2015년 초다. 완성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노동을 많이 하는 사람인 건 사실이다. 이참에 쉬어볼 생각도 했는데 스코세이지 감독이 오래 쉬지 말라고 했다.(웃음)”
-2월 26일 ‘기생충’ 흑백판이 개봉한다. 흑백판을 선보이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마더’ 때도 흑백 버전을 만들었다. 고전영화나 옛 클래식 영화에 대한 동경이 있다. 세상 모든 영화가 흑백이던 시절이 있지 않나. 내가 1930년대를 살고, 이 영화를 흑백으로 찍었다면 어땠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흑백 버전을 만들어 로테르담영화제에서 상영했다. 당시 어느 관객이 ‘흑백으로 보니 더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하더라. ‘무슨 의미지?’라고 생각하며 다시 봤다. 컬러감이 빠지니 확실히 배우들의 섬세한 표정 연기와 뉘앙스를 더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모험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2월 19일 ‘기생충’ 기자회견장을 가득 메운 국내외 취재진.[사진=박해윤 지호영 기자]
“내가 ‘플란다스의 개’(2000)라는 영화로 데뷔했을 때는 독립영화가 메인스트림에 침투해 다이내믹한 충돌을 일으킬 수 있는 여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모험적인 시도를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그 점이 안타깝다. 1980~1990년대 붐을 이뤘던 홍콩 영화가 급격히 쇠퇴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우리가 그런 길을 걷지 않으려면 한국 영화산업계가 모험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리스크를 두려워하지 말고 더 도전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많은 재능 있는 감독이 산업계와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고 훌륭한 독립영화들을 선보이고 있기에 우리 영화계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본다.”
-부잣집 안주인 역을 한 조여정 씨에 대해 미국에서 큰 관심을 보였다고 들었다.
“팩트부터 말하자면 이정은 씨에 대한 관심도 뜨거웠다. ‘오리지널 하우스 키퍼’ 역을 한 배우가 누군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녀가 늦은 밤 벨을 누르는 순간 영화의 모든 것이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SAG에서 우연히 만난 톰 행크스 부부는 이정은 씨를 보더니 반가워하며 여러 질문을 했다.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10여 분 동안 조여정 씨에 대해 이야기했다. 연기와 캐릭터가 무척 인상적이었다면서…. 두 배우뿐 아니라 모든 배우가 각각의 캐릭터를 잘 살리며 좋은 앙상블을 보여줬기에 아카데미 시상식의 투표권을 가진 미국배우협회 분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은 듯하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송강호는 “감독님과 함께한 지 20년이 됐는데 SAG에서 배우들이 ‘앙상블상’을 받았을 때처럼 기뻐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고 덧붙였다.)
-한국 영화사에 큰 업적을 남겨 ‘봉준호 생가를 보존해야 한다’ ‘동상을 세워야 한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는데…
“그런 기사를 봤는데 ‘이 모든 것이 다 지나가리라’는 생각으로 웃어 넘겼다. 동상이나 생가 이야기는 내가 죽은 후 해줬으면 좋겠다.(웃음)”
평상심 유지하며 새로운 프로젝트 준비 중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 출연진, 스태프들, 제작자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박해윤 지호영 기자]
“아직은 제작 초기 단계고 프로듀서로 참여하게 됐다. 연출할 감독은 차차 찾을 것이다. ‘기생충’이 가진 주제의식인 동시대 빈부격차의 문제를 오리지널 영화처럼 블랙코미디로 깊이 있게 다룰 예정이다. 5~6개의 완성도 높은 에피소드로 구성된 TV 시리즈가 될 전망이다. 현재 제작진과 이야기의 방향, 구조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오는 ‘설국열차’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미국에서 방영되는데, 제작 기간이 5년여가 걸린 것을 보면 ‘기생충’ 드라마 역시 금방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차기작으로 한국 영화와 영어로 된 외국 영화를 함께 준비 중인 것으로 안다.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나.
“지금 준비하고 있는 두 개의 프로젝트는 몇 년 전부터 기획해온 것들이다. ‘기생충’ 때문에 프로젝트에 변화가 생기진 않았다. ‘기생충’을 만들 때처럼 두 작품도 특별한 목표를 정하지 않고 평소 하던 대로 평상심을 유지하며 차근차근 준비해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