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가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제4회의장에서 열린 첫 의원총회에 참석해 연분홍빛 엠블럼을 배경으로 발언하고 있다(왼쪽). 안철수 국민의당(가칭) 창당준비위원장이 18일 국민의당 대구시당 창당대회에서 주황색 당색을 배경으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시스]
19세기 영국 여성 시인 크리스티나 로세티(1830~1894)의 동시 ‘무엇이 핑크색이지?(What Is Pink)’의 시작과 끝이다. 다양한 색깔에 대해 묻고 그것에 부합하는 자연물로 답하는 이 시가 핑크로 시작해 오렌지색으로 끝난다는 게 의미심장하다. 선거철을 앞든 한국에서 불거진 ‘색깔론’을 미리 예상이라도 한 듯해서다.
‘색깔론이 등장하는 것을 보니 선거철은 선거철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다. 하지만 이번엔 과거 색깔론과 다르다. ‘빨갱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사상적 색깔론이 아니라 실제로 무슨 색을 당색(黨色)으로 쓰느냐를 둘러싼 논란이기 때문이다.
주황과 분홍이 불러일으킨 색깔론
민중당 엠블럼, 국민당 로고, 미래통합당 엠블럼(왼쪽부터). [민중당 공식 홈페이지, 안철수 공식 페이스북, 미래통합당 공식 홈페이지]
이는 미술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 꺼낼 말은 아니다. 주황색에 해당하는 영어 표현이 오렌지색이기 때문이다. 양당의 당색은 채도 차이로 앞 이름이 살짝 다를지언정 국제적으로 기본 색상은 오렌지(주황)색으로 분류된다. 앞에서 인용한 로세티의 시 뒷부분을 의역하면 이렇다. ‘무엇이 주황색이지?/ 오렌지잖아…근데 왜 오렌지인 거야? / 주황 하면 오렌지니까.’ 따라서 국민의당 측 대응은 “저쪽은 분홍색이지만 우리는 핑크색”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궤변이다.
그다음으론 한국 정당사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색이 등장했다. 로세티의 동시 첫머리에 등장하는 분홍(핑크)색이다. 자유한국당,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전진당)이 뭉쳐 새로 탄생한 미래통합당이 2월 17일 출범식에서 ‘해피핑크’로 이름 붙인 분홍색을 공식 당색으로 들고 나왔다. 주류 보수 정당을 자임해온 자유한국당이 2012년부터 써온 빨간색을 버리고 기존 빨간색에 흰색을 섞은 파스텔톤의 핑크색을 파격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중도·청년·여성까지 외연을 넓히겠다는 의지의 발현으로 해석됐다.
문제 제기는 정치권 밖에서 나왔다. 트로트 열풍 주역인 송가인의 팬클럽 회원들로부터 자신들의 공식 색상 ‘핫핑크’와 유사해 불쾌하다는 반응이 나오기 시작한 것. 송가인 팬에 보수 성향의 실버세대가 많은 점을 노려 “송가인 인기에 편승하려는 거 아니냐” “송가인 노래를 ‘선거송’으로 삼으려는 사전 포석 아니냐”는 반발이다.
핑크색은 1970년대 이후 서구 LGBT(성소수자) 운동가들 사이에서 ‘성정체성’을 상징하는 색으로 쓰였다. 특히 게이(남성동성애자) 간 자신의 성정체성을 암시하는 색이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독일이 남성동성애자들을 낙인찍으려고 붙인 역삼각형의 분홍색 천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그래서 LGBT를 상대로 돈을 버는 것을 ‘핑크 머니’라 부른다. 보수통합을 내건 미래통합당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다는 볼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11가지 기본색의 뉴 페이스
영국왕 윌리엄3세의 초상화. 프랑스 오랑주공국과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왕을 겸한 그는 신교도의 보호자로서 오렌지색 의상을 입고 있다(왼쪽). 오렌지색 의상을 입고 축제를 벌이는 네덜란드인들. [National Portrait Gallery, flickr Martin Abegglen 제공]
문화인류학자 브렌트 벌린과 언어학자 폴 케이가 1969년 발표한 기본색 이론은 언어의 발달과 색의 식별이 함께 이뤄졌음을 보여줬다. 밝음과 어둠을 구별하는 흑백에서 시작해 빨강, 녹색, 노랑, 파랑, 갈색, 보라로 확장된다. 다양한 언어권에서 모두 11개의 기본색이 일곱 단계를 거쳐 분화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그 마지막 단계의 세 가지 색이 분홍(pink), 주황(orange), 회색(grey)이다.
그만큼 주황과 분홍은 색채 역사에서 뉴 페이스다. 과거 두 색깔은 빨강으로 분류됐다. 중세 영국 시문에서 주황빛 꾀꼬리(oriole) 깃털을 붉다(red)고 표현한 이유도 여기 있었다. 영어에서 색에 과일 이름이 들어간 것은 오렌지가 유일한데, 4500년 전 중국에서 재배되기 시작해 아랍을 거쳐 유럽 남부로 유입된 이 과일을 보고 비로소 색 이름이 부여됐기 때문이다. 영국의 경우 이는 대략 9세기 이후다.
분홍의 역사는 이보다도 짧다. 자연계에는 분홍 색소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에선 인공색소를 사용해 분홍빛 도자기를 제조했는데 이게 유럽에 수입돼 인기를 끈 17~18세기에 이르러 핑크라는 이름이 부여됐다. 사실 핑크는 주름 장식이 있는 가장자리를 뜻했다. 가장자리가 삐쭉빼쭉하게 잘리는 핑킹가위의 어원이기도 하다. 그러다 당시 유럽에서 유행한 분홍장미의 꽃잎이 이를 닮았다고 해 핑크라는 이름이 부여된 것이다. 그래서 유럽에선 장미 하면 빨강을 떠올리는 한국과 달리 로제와인 빛깔의 분홍을 떠올린다. 맨 앞에 언급한 로세티의 동시에서 핑크가 ‘분수대 가장자리에 핀 장미’를 연상케 하는 이유다.
비주류의 색, 오렌지와 핑크
동성애자의 축제인 샌프란시스코의 핑크 트라이앵글 축제에서 분홍빛 역삼각형 마크를 착용한 사람들(왼쪽), 올해 1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여성행진 시위에 참석한 여성의 핑크빛 모자에 착용된 뱃지들. 흑인인권운동, 여성참정운동, 페미니즘운동의 메시지가 적혀있다. [The Pink Triangle 홈페이지, 게티이미지]
흥미로운 것은 한국에서 보수 계열 정당이 채택하는 주황색과 핑크색이 유럽에선 혁명의 색깔로 인식됐다는 점이다. 유럽 종교전쟁 당시 신교도 진영을 대표한 네덜란드의 국가색으로 대접받는 주황은 과거 주류 가톨릭에 저항한 비주류 프로테스탄트를 상징하는 색이었다. 또 핑크는 역사적으로 주류 남성에 맞서는 여성, 주류 이성애자에 맞서는 동성애자의 색이었다.
공산주의자에 동조하는 사람을 ‘빨갱이’라고 부르게 된 어원 역시 핑크와 연관돼 있다. 빨갱이에 해당하는 영어 표현 ‘Pinko’는 ‘색으로 치면 물 빠진 빨강’이라는 조롱의 의미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1925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타임’은 오늘날 한국에서 ‘강남좌파’에 해당하는 이들을 이렇게 불렀다. ‘분홍색 응접실(parlor pink) 사회주의자.’ 사치스러운 분홍색 응접실에서 책으로만 공산주의를 접한 몽상가라는 의미였다.
What Is Pink?
By Christina Rossetti
What is pink? A rose is pink
By the fountain's brink.
What is red? A poppy's red
In its barley bed.
What is blue? The sky is blue
Where the clouds float through.
What is white? A swan is white
Sailing in the light.
What is yellow? Pears are yellow,
Rich and ripe and mellow.
What is green? The grass is green,
With small flowers between.
What is violet? Clouds are violet
In the summer twilight.
What is orange? Why, an orange,
Just an oran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