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앞 3대 명절이 된 '경록절' 파티의 주인공인 한경록의 공연 모습. [캡틴락컴퍼니]
비즈니스와는 전혀 관계없이 시작된 어떤 이벤트가 있다. 회사나 단체가 주최한 것도 아닌, 한 명의 뮤지션이 어떤 의도나 영리를 추구하지 않고 오직 재미를 위해 통 크게 벌린 일이었다. 크라잉넛의 베이시스트 한경록, 일명 ‘캡틴 록’의 생일 파티다. 매년 2월 11일, 가족을 제외하면 남의 생일을 기억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적어도 그의 친구들은 그날을 기억할 수밖에 없다.
갈수록 판이 커지는 생일잔치
2월 11일 서울 홍대 앞 최대 공연장 무브홀에서 열린 경록절 파티에서 크라잉넛의 뜨거운 공연사진. [캡틴락컴퍼니]
해를 거듭할수록 판은 커졌다. 약 100석 규모의 클럽에서 시작된 이 잔치는 대형 펍을 거쳐 대형 치킨집으로 규모를 키웠다. 그즈음 이날은 일개 뮤지션의 생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이날을 ‘경록절’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핼러윈과 더불어 ‘홍대 앞 3대 명절’로 지정된 것도 그때쯤이다.
스마트폰과 트위터가 보급되면서 ‘홍대 앞 핵심 관계자들의 비밀 행사’처럼 여겨지던 경록절은 인디신 바깥으로도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크라잉넛, 갤럭시 익스프레스, 더 문샤이너스, 킹스턴 루디스카 등 한경록과 오랜 세월 동고동락해온 뮤지션뿐 아니라 김창완, 김수철, 강산에 같은 레전드까지 즉석에서 노래하고, 관람석에는 일반 관객 대신 음악인들이 가득한 이 진귀한 현장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져 나가면서 화제가 된 것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그날 소비되는 맥주는 20만cc에서 시작해 매년 10만cc씩 늘어났지만 사라지는 시간 또한 빨라졌다. 또한 로큰롤 에너지가 가득한 날것의 이벤트에서 조금씩 ‘행사’로 제 꼴을 갖춰나갔다. 2016년부터는 홍대 앞 최대 규모 공연장인 무브홀(약 800석 규모)에서 열렸고, 한경록은 아예 자신의 페이스북 공지를 통해 모두에게 개방된 이벤트로 판을 급격히 키워버렸다. 그때부터 경록절은 뮤지션들만의 잔치를 넘어 음악을 좋아하는 모든 이를 위한, 거기에 술까지 무한정 제공되는 유일무이한 페스티벌이 됐다.
100만cc 맥주 제공
12개 맥주업체가 무료로 제공한 수제맥주 80만cc를 제공한 맥주자판기. [캡틴락컴퍼니]
참가자 모두 입구에서 체온 측정을 한 후 입장할 수 있었다. 스태프들은 세정제로 손을 소독한 후 들어갈 것을 권유했다. ‘마포 인디 축제’라는 타이틀이 붙은 올해 경록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공연장 한 구석에 비치된 거대한 기계였다. 무려 80만cc의 맥주가 저장된 자판기였다.
아니 잠깐. 경록절에 제공되는 맥주는 모두 무료인데 자판기가 웬 말인가. 알고 보니 첨단 설비였다. 입장할 때 나눠준 태그를 자판기에 갖다 대면 6만 원의 잔고가 뜨고 자신이 따라 마신 만큼 금액이 차감되는, 처음 보는 시스템이 들어와 있던 것이다(1cc당 1원씩 차감됐다). 자판기 시스템 말고도 맥주 부스에서 나눠주는 병맥주과 캔맥주까지 합치면 이날 하루만 100만cc의 맥주가 무료로 제공됐다. 과거에는 기성 맥주를 사서 마시는 형태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소규모 수제맥주업체의 협찬이 붙기 시작했다. 음악뿐 아니라 맥주도 ‘인디 연합’으로 함께하고, 또한 갈수록 협찬 업체도 늘어나고 있다.
‘더 사운드’와 ‘불고기 디스코’의 발견
'더 사운드'의 싱어 줄리앤이 절창하고 있다(왼쪽). 혼성 록밴드 '데디오레디오' 데디오레디오의 공연 모습. [캡틴락컴퍼니]
팀당 약 10분씩, 총 18팀이 무대에 올라 공연했다. 전과 달리 사전에 공연 희망팀을 모집해 라인업을 꾸렸기에 익숙한 밴드보다 신인급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 팀들은 결성 이래 가장 많은 관객 앞에서, 가장 흥청망청한 분위기에서 공연했을 것이다. 잊히는 팀이 있었고, 눈도장을 찍은 팀도 있었다. 캐나다계 혼혈 멤버 줄리앤이 보컬을 맡은 ‘더 사운드’와 칵스의 보컬이던 이현송의 새 밴드 ‘불고기디스코’가 눈에 들어왔다. 크라잉넛 드러머 이상혁의 사이드 프로젝트 ‘데디오레디오’의 멤버 백누리는 크라잉넛의 오래된 팬이었다며 “이 자리에 있는 게 성덕(성공한 덕후)이 된 기분”이라고 했다,
과거 ‘한경록과 친구들’의 페스티벌이었다면 올해는 ‘curated by 한경록’이라고 할 법한 페스티벌로 진화했다. ‘마포 인디 축제’라는 표현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새벽 1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한경록은 취한 채 무대에 올라 폐회를 알렸다. 한 잔이 더 아쉬운 이들은 삼삼오오 흩어졌다.
나는 매년 경록절을 기록해왔다. 자료를 뒤져보니 처음 매체에 경록절을 소개한 게 2011년이다. 내 기억 속 경록절은 그보다 더 오래됐다. 친구들끼리 잔치하던 날이 홍대 앞 명절이 되고, 이제는 뉴스에도 가끔씩 등장하는 이벤트로 커온 모습을 꾸준히 지켜봐온 셈이다. 그날이 되면 2박 3일씩 술을 마시던 시절은 지나가고, 과음 후 다음 날을 걱정하는 중년의 나이가 됐다.
홍대 앞 인디신에서 함께 커온 이들이 경록절마다 모인다. 몇 주 전에 본 이도, 몇 년 만에 만난 이도 있다. 안부를 확인하고 잔을 부딪친다. 처음 경록절을 명절이라 칭한 건 나 스스로가 즐거워서였다. 이제는 아랫세대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 세대가 흘러갔음을 느낀다. 흘러간 이들끼리 조우하고, 흘러오는 이들이 어우러진다. 경록절은 그렇게 한 세대의 명절에서 음악과 축제를 좋아하는 모든 세대의 명절이 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