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의 구하라(왼쪽)와 설리. [구하라 인스타그램]
또 다른 설리와 구하라가 발생하지 않게 하려면 인기 연예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인식 확산이 필요하다. 프랑스 문학평론가이자 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가 설파한 ‘속죄양(또는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속죄양은 고대사회에서 신에게 제사를 올릴 때 눈처럼 희고 깨끗한 염소나 양을 제물로 바친 것에서 유래한다. ‘황금가지’로 유명한 영국 신화학자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의 표현에 따르면 이는 ‘신성한 왕의 살해’에서 기원한다.
인류 원죄로서 속죄양 문화
네덜란드 화가 얀 판 에이크의, ‘어린 양에 대한 경배’, 1432, 벨기에 겐트 시의 성 바프 대성당.
동서양 신화를 보면 이런 ‘신성한 왕의 죽음’을 암시하는 경우가 여럿 있다. 문명이 태동할 무렵 발생해 인류의 무의식 속에 집단적 죄의식(원죄)으로 새겨졌다는 점에서 ‘초석적 살해’라고도 부른다. 이런 집단적 ‘살인의 추억’은 살짝 은폐된 채 전승된다. 지상에서 가장 현명한 이로 꼽혀 왕좌에 앉았다 가장 저주받은 존재로 추락한 오이디푸스나 ‘신의 아들’로 강림했지만 최고 흉악범의 몫인 십자가형에 처해진 예수가 대표적이다.
동양에선 멀리 갈 것도 없다.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아들인 태종 이방원에게 사실상 정치적 살해를 당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방원은 시조인 아비의 뜻을 거스르고 여러 형제를 살육했으며, 그것에 격노한 아버지를 정치적으로 생매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왕조는 ‘신성한 왕의 죽음’이라는 ‘초석적 살해’ 위에 세워진 셈이다. 아비를 직접 죽이지 않았다 해도 형제를 살육했다는 점에서 히브리 성서에서 인류의 기원에 아로새겨진 초석적 살해인 ‘카인과 아벨 신화’의 변주라 할 수 있다.
고대사회의 인신공양은 이러한 초석적 살해의 변주로 볼 수 있다. 그러다 문명화가 진행되면서 사람 대신 염소나 양, 말, 소 같은 동물로 대신하게 됐다. 희생(犧牲)이라는 한자어에 우제류 가축을 함의하는 소 우(牛)자가 들어가 있는 이유다. 이런 희생 제의에 바쳐지는 동물은 남다른 특징이 있어야 했다. 눈처럼 희거나 얼룩이 없어야 했다. 국가나 사회적 차원에서 저지른 죄악을 뒤집어쓰고 대신 희생돼야 했기에 그 자신은 아무런 죄 없는 존재임을 상징해야 했기 때문이다. 죄를 대신 짊어진다는 이 개념은 훗날 대속(代贖)이라는 종교용어가 된다.
욕망의 삼각도
인신공양 문화는 사라졌지만 인간을 속죄양으로 삼는 문화는 변형된 형태로 존속돼왔다고 지라르는 고발한다. 한 사회 내부의 갈등 수위가 통제 불능 상태까지 치솟을 때 무고한 누군가를 죄인으로 낙인찍은 뒤 집단 화풀이를 펼친다. 일종의 마녀사냥이다.이를 견디다 못한 그 누군가가 목숨을 내려놓으면 사회는 숙연한 분위기로 전환되면서 집단죄의식을 표출한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이게 찬물을 끼얹는 효과를 발휘해, 집단적 분노 게이지가 위험 수위까지 치솟았던 사회는 돌연 안정과 평화를 되찾는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다시 사회적 갈등의 수위가 높아지면 사람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무고한 속죄양을 찾아 나서는 무한 루프의 행태를 보인다는 것이 지라르의 통렬한 발견이다.
신화에서 속죄양의 시초는 ‘신성한 왕’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속죄양이 연예인이 된 걸까. 이를 이해하려면 다시 ‘모방욕망’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모방의 동물(호모 미미쿠스)’이다. 여기서 모방은 단순히 누군가의 언행을 따라 한다는 뜻만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이 뭔가를 욕망할 때 그중 상당수는 그 뭔가에 대한 누군가의 욕망을 모방한 경우가 많다. 이는 프랑스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인 자크 라캉이 갈파한 내용이다.
지라르는 이를 적극 수용하면서 욕망의 삼각도를 그려낸다. 그 한 꼭짓점이 욕망의 대상이고, 다른 한 꼭짓점이 ‘욕망하는 나’라면, 마지막 꼭짓점은 나에게 그 대상에 대한 욕망을 일깨워준 동시에 욕망의 대상을 놓고 경쟁자가 된 ‘욕망의 짝패’다.
팬클럽 문화를 들여다보면 쉽게 이해된다. 맨 처음 어떤 가수나 배우를 좋아하게 될 때 나보다 먼저 그를 좋아해 나에게 그를 소개시켜준 누군가가 존재한다. 보통 윗세대 오빠·누나·형이거나 동년배 친구다. 그래서 함께 그 스타를 좋아하다 보면 경쟁심이 생겨 더 깊이 빠져들게 된다. 그렇게 욕망을 모방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욕망의 경쟁자가 되는 존재가 욕망의 짝패다. 팬클럽에 가입하면 그 욕망의 짝패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해당 스타에 대한 충성심은 하늘을 찌르게 된다.
호모 미미쿠스의 비극
조르조 아감벤(왼쪽)과 르네 지라르. [gettyimages]
이런 욕망의 삼각도를 기가 막히게 보여주는 고전적 노래가 있다. 조영남이 팝송을 번안해 1969년 발표한 ‘최진사댁 셋째딸’이다. 노래 속 화자인 칠복이는 건넛마을에 사는 최 진사댁 셋째딸을 전혀 몰랐다. 심지어 얼굴 한 번 본 적 없다. 하지만 ‘먹쇠라는 놈’과 ‘밤쇠라는 놈’을 통해 그 존재에 눈뜨게 된다. 칠복의 사랑은 욕망의 짝패로서 먹쇠와 밤쇠의 욕망을 모방한 것이다. 하지만 앞뒤 안 보고 최 진사댁으로 쳐들어가 “요즘 보기 드문 사윗감이 왔노라”며 큰소리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사랑을 쟁취한다.
과거엔 이런 모방욕망의 확장성이 작았다. 최 진사댁 셋째딸의 미모는 건넛마을 총각들의 애만 태우는 정도에 머물렀다. 하지만 대중매체가 발달하면서 그 범위는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됐다. TV 시대에 전국 단위로 확장됐고, 인터넷 시대가 도래하면서 지구촌 전역을 망라하게 됐다. 선망의 대상은 하나인데 그를 선망하는 사람의 수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증한 것이다.
지라르는 이렇게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대한 갈증의 축적이 사회적 갈등과 폭력의 분출로 비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연예인은 직접적으로 모방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동시에 충족되지 못하는 욕망의 갈증을 증폭시키는 존재다. 또한 인기를 먹고사는 존재이기에 사람들의 평판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선망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마녀사냥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위험에 노출된다.
고대 ‘신성한 왕’이 그런 존재였다. 구성원 대다수가 절대적으로 선망하는 존재지만 노쇠하거나, 천재지변 또는 돌림병이 발생하면 세상의 구원을 위해 희생되고 새로운 왕으로 대체될 운명을 지닌 존재. 주권 개념이 확립된 로마제국 이후에는 최고 주권자의 대척점에 선 존재가 ‘인간 속죄양’이 됐다. 그 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이루면서 법적인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는 노예, 천민, 유대인과 집시로 대표되는 이방인, 마녀, 빨갱이…. 이탈리아 사상가 조르조 아감벤이 이들에게 ‘신성한 인간’이라는 뜻의 ‘호모 사케르’라는 호칭을 붙인 이유가 여기 있다. 최고 주권자의 그림자로서 과거 ‘신성한 왕’이 맡았던 속죄양의 역할을 대신 떠맡은 존재라는 역설의 의미가 담긴 것이다.
이런 호모 사케르 중 하나가 궁중 광대였다. 왕을 즐겁게 하기 위해 권력을 희롱하고 풍자할 권한을 누렸지만 자칫 그 역린을 건드리면 언제든 죽음을 맞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광대는 흉내의 대가라는 점에서 호모 미미쿠스의 전형이기도 했다. 햄릿이 그런 광대의 전통에 충실한 배우들에게 “배우는 시대의 척도이자 짧은 연대기”라거나 “연극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 돼야 한다”고 설파한 이유다.
과거 광대는 그 치명성을 명징하게 인식했다. 그래서 모방을 통해 웃음과 인기를 누리되, 모방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했다. 그들이 우스꽝스러운 놀림거리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은 이유다. 반면, 현대 광대들은 이를 망각했다. 모방욕망의 고삐를 거침없이 풀어놓으라고 권하는 고도 자본주의 시대 대중스타로 각광받는 그들은 대중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외줄타기보다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들에 대한 열망을 아무런 통제 없이 풀어놓을 수 있게 된 대중 또한 그들을 왕처럼 숭배하는 것이 ‘신성한 왕’의 비극적 운명을 소환할 수 있음을 알지 못한다.
속죄양부터 찾는 악순환 깨야
폴란드 화가 얀 마테이코의 ‘궁중 광대 스탄치크(Sta′nczyk)’, 1862, 폴란드 바르샤바 국립미술관.
“누가 죄인인가”를 외치며 속죄양 찾기에 골몰하기보다 그 구조적이고 심층적 원인이 무엇인지를 먼저 성찰해야 한다. 마녀사냥에 맞서 싸우는 길이 멀쩡한 사람을 마녀로 몰아넣은 종교재판관 사냥에 몰두하는 것이 돼선 안 된다. 우리 안에 숨겨진 마녀사냥꾼이 발현될 수 있는 심리적 조건과 문화적 구조를 먼저 인식하고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제도적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돼야 한다.
물론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러한 희생양 메커니즘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한 신화가 예수 신화다. 예수는 힘 있는 다수를 위해 힘없고 약한 소수를 속죄양으로 삼는 문화를 통렬히 고발하면서 스스로 희생양이 돼 십자가에 매달렸다. ‘너희의 죄를 내가 대신 짊어지고 가니(대속) 다시는 나처럼 무고한 속죄양을 만들지 말라’고. 그것이 바로 ‘사탄의 길’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예수의 이름’으로 그 누군가를 사탄이라 손가락질하고 무리 지어 공격하는 것을 무수히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