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션스 8’의 한 장면. 배우 앤 해서웨이가 팬더 브레이슬릿을 착용하고 있다. [Photo by Barry Wetcher © 2018 Warner Bros. Entertainment Inc.]
2018년 개봉한 범죄 장르의 코미디 영화 ‘오션스8’ 이야기다. 샌드라 불럭, 케이트 블란쳇, 앤 해서웨이 같은 유명 여배우가 총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다코타 패닝, 케이티 홈스, 킴 카다시안 등 화려한 카메오까지 더해져 볼거리가 가득한 영화.
행동 대장인 루(케이트 블란쳇 분)가 그들의 타깃인 까르띠에 다이아몬드 목걸이 ‘투상’을 설명하는 영화의 한 장면이다.
케이트 블란쳇 “그 목걸이는 ‘투상’이라고 불려. 까르띠에 주얼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쟌느 투상의 이름에서 왔지.”
샌드라 불럭 “다이아몬드 무게가 6파운드(2.72㎏)가 넘어.”
치밀한 계획을 바탕으로 투상을 손에 넣은 일당은 메트 갈라 현장에서 목걸이를 산산이 공중 분해해버린다. 6파운드가 넘는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순식간에 분리돼 다른 목걸이, 귀걸이, 팔찌 등으로 변신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그다음 화려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일당 7명이 주얼리를 각기 나눠 착용한 채 메트 갈라를 유유히 빠져나온다.
영화는 화려한 출연진을 자랑했지만 투상 목걸이는 또 다른 주연이었다. 영화 속 대사대로 투상은 실제 존재하는 목걸이일까. 정답은 ‘그렇다’이다. 쟌느 투상(1887~1976) 역시 허구가 아닌 실존 인물. 1933년부터 1968년까지 까르띠에의 주얼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란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보석 디자인부터 기획, 생산까지 전 과정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왕의 보석상, 보석상의 왕’
에드워드 7세는 까르띠에를 최초 ‘영국 황실 보석상’으로 임명했다. 그 후 까르띠에는 스페인, 포르투갈, 러시아, 시암(현 태국), 그리스, 세르비아, 벨기에, 루마니아, 이집트, 알바니아 왕실과 오를레앙 일가, 모나코 공국으로부터 황실의 보석상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까르띠에는 설립자인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부터 3대를 거치면서 보석상으로서 명성을 높여갔고 예술 장르로 보석 영역을 넓혔다. 그 역사가 어느덧 172년에 이르렀다. 쟌느 투상은 그 까르띠에 성장사의 중심에 선 인물이다.
이제는 브랜드의 상징이 된 팬더(Panthere·프랑스어로 표범) 컬렉션이 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애초 팬더는 아프리카 여행 중 먹이를 찾아 헤매는 팬더의 모습에 매료된 까르띠에 창립자의 3대손 루이 까르띠에가 이를 모티프로 한 작품을 만들기로 결심하면서 세상에 등장했다. 최초의 팬더 모티프는 1914년 오닉스(검정색 보석)와 다이아몬드 스폿이 장식된 시계에 추상적인 형태로 처음 선보였다.
예리한 재치와 확고한 신념으로 ‘팬더’라는 애칭으로 불린 쟌느 투상에게 루이 까르띠에는 1917년 두 그루의 사이프러스 나무 사이를 거니는 팬더가 장식된 소지품 케이스를 선물했다. 이후 1919년 쟌느 투상은 팬더 모티프가 장식된 골드 및 블랙 캔턴 에나멜 소재의 소지품 케이스를 주문했고, 이때부터 팬더는 그만의 특별한 시그니처가 됐다.
쟌느 투상이 루이 까르띠에를 처음 만난 건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1914)되기 전이었다. 그는 예술가들이 넘쳐나는 파리 사교 모임에서 늘 돋보이는 존재감을 드러내던 뮤즈였다. 쟌느 투상의 뛰어난 심미안과 독창성에 감명받은 루이 까르띠에는 그에게 브랜드에 합류할 것을 제안했다. 핸드백 디자인부터 시작한 그는 소지품 케이스와 담배 케이스에 이어 곧 모든 종류의 액세서리를 디자인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까르띠에 주얼리 디자인 전문가로 활약하게 됐다.
인터뷰를 하고 있는 쟌느 투상(1950년대·왼쪽). 쟌느 투상이 구상한 ‘새장에 갇힌 새’와 ‘자유를 되찾은 새’ 브로치 디자인 도안. [Archives Cartier © Cartier]
그는 1914년부터 만들기 시작한 팬더를 모티프로 한 주얼리를 더욱 발전시켰다. 디자이너 피에르 르마르샹과 함께 파리 근교에 있는 뱅센동물원을 자주 방문하면서 마치 조각품과도 같은 새로운 실루엣으로 1940년대를 대변하는 위풍당당한 팬더를 제작했다. 이들이 만든 팬더는 업계에선 20세기 가장 매혹적인 주얼리 작품으로 꼽힌다.
쟌느 투상을 얘기할 때 그의 강인함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리가 점령된 1940년 브랜드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뤼드라뻬 부티크 창문에 ‘새장에 갇힌 새’라는 이름의 브로치를 진열하면서 독일 당국에 항의했다. 레드와 화이트, 블루 컬러의 슬픈 눈을 가진 나이팅게일이 장식된 브로치로 인해 그는 독일 나치정권하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심문을 받기도 했다. 마침내 1944년 파리가 해방되자 그는 새장의 문이 활짝 열린 철창 밖에서 날개를 편 ‘자유를 되찾은 새’라는 이름의 브로치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하이 주얼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까르띠에]
이듬해인 1949년 쟌느 투상은 사파이어가 세팅된 팬더 브로치를 제작했고, 이 모델 역시 윈저 공작부인의 소유가 됐다. 이 팬더 브로치는 까르띠에 역사에 큰 이정표로 남아 있다. 섬세한 조각품처럼 만들어진 3차원적 작품에 고양잇과 동물의 자연스러움을 가미한 브로치를 당시 신문은 ‘주얼리계의 핵폭탄’이라고 표현했다.
쟌느 투상은 고객의 성향을 반영해 주얼리에 표현했다. 시크하고 대담하면서 자유로우며 자신만의 개성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는 주얼리를 추구한 고객 덕분에 쟌느 투상의 디자인 세계도 팬더를 넘어 호랑이나 도마뱀 등으로 다양해졌다.
윈저 공작부인은 벨트에 팬더 브로치를 착용하는 과감한 스타일로 나타난 반면, 프랑스 영화배우 쟈클린 델루박은 도마뱀 네클리스를 착용하고 초현실주의 무도회에 등장했다. ‘멕시코의 팬더’로 알려진 여배우 마리아 펠릭스는 경마장에서 뱀 모티프의 주얼리를 선보였으며, 20세기를 대표하는 스타일 아이콘 데이지 펠로스는 무도회에 힌두 모티프의 네클리스를 착용하고 등장했다. 또한 당시 가장 부유한 여성 가운데 한 명이던 바버라 허턴은 호랑이 모티프의 주얼리로 어깨를 장식한 적이 있다. 모두 쟌느 투상의 작품이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스타일 아이콘
[Nils Herrmann, Collection Cartier © Cartier, Vincent Wulveryck, Collection Cartier © Cartier, N. Welsh, Collection Cartier ©Cartier]
영화 ‘오션스8’에는 투상의 목걸이는 물론, 팬더 컬렉션의 주얼리와 시계도 등장한다. 쟌느 투상이 창조해 오늘날 까르띠에의 상징이 된 팬더 컬렉션은 까르띠에 공식 웹사이트, 메종 청담 및 전국 백화점·면세점에 입점해 있는 부티크에서 직접 만날 수 있다.
사진작가이자 의상 디자이너인 세실 비턴(1904~1980)은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찬란한 빛의 다이아몬드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주얼리…. 동양문화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이국적인 브레이슬릿(팔찌)…. 뱀, 표범, 호랑이를 비롯해 다양한 동물 모티프… 누군가는 작고 가녀린 여성이 주얼리 예술에 혁신을 일으켰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더욱 다양한 디자인의 주얼리를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그녀 덕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