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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근 위스키시장에 대만과 인도가 ‘강력한’ 명함을 내밀고 있다. 대만과 인도는 열대·아열대기후에 속해 위스키 제조에 맞지 않는 지역으로 여겨져왔다. 위스키는 곡물을 증류한 술인데, 기온이 높으면 알코올이 빠르게 증발돼 위스키 제조가 어렵기 때문이다. 중남미처럼 사탕수수로 럼(rum)이나 만들면 되는 이들 국가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세계 1~4위 위스키는 인도産
[사진 제공 · ABD인디아 홈페이지]
인도 사람들은 수입 위스키를 마실까. 그렇지 않다. 영국 알코올음료 전문 시장조사 회사 IWSR와 전문지 ‘스피릿비즈니스(The Spirits Business)’가 발표한 2017년 위스키 판매량 세계 순위에 따르면 1~10위 중 7개가 인도산이다(표 참조). 특히 1~4위를 전부 인도 위스키가 차지했다.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글로벌 브랜드 ‘조니워커(Johnnie Walker)’나 ‘잭다니엘(Jack Daniel’s)’은 각각 5위와 6위를 차지했을 뿐이다. 이 두 브랜드의 연간 판매량은 각각 1900만, 1250만 케이스. 그런데 1위를 차지한 인도 위스키 ‘오피서스 초이스(Officer’s Choice)’의 연간 판매량은 3000만 케이스를 가볍게 넘어섰다. 인도 위스키는 글로벌 기업과 협업한 경우가 많지만, 어쨌든 인도 위스키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만 인도 위스키는 유럽연합(EU)에서 위스키로 판매되진 못한다. EU는 위스키를 ‘곡물을 원료로 한 증류주를 나무통에서 숙성시킨 것’으로 정의한다. 인도 위스키는 사탕수수에서 나온 당밀이 주원료고, 여기에 인도산 곡물을 섞어 만든다. 유럽에서 이런 술은 럼으로 간주된다. 인도에서는 곡물을 넣었다는 이유로 주세법상 위스키로 분류된다.
한편 인도에서는 자국 내 위스키 붐에 힘입어 1987년부터 오직 보리 맥아만으로 증류소 한 곳에서 만드는 정통 위스키 ‘싱글 몰트 위스키’도 생산하고 있다. 고급 시장을 노린 것이다. 대표 제품으로 ‘암룻 퓨전(Amrut Fusion)’이 꼽힌다. ‘위스키 바이블’의 저자 짐 머레이가 2010년 “100점 만점에 97점”이라며 세계 3위 위스키로 꼽았던 제품이다. 이 술은 2008년 ‘몰트 마니악스 어워드(The Malt Maniacs Awards)’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며 영국, 미국, 일본 등으로 활발하게 수출되고 있다. 암룻 퓨전은 전체적으로 맵고 짭조름한 맛이 난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도 특유의 맛을 가진 위스키인 것이다.
고정관념 깬 대만 위스키
위스키 원액이 통에서 12년, 3년 증발된 모습과대만 카발란 위스키 라인업(왼쪽부터). [사진 제공 · 골든블루]
카발란 위스키 증류소 전경. [사진 제공 · 골든블루]
물론 추운 환경에서 30년 걸려 만든 술과 5~6년 단기간에 숙성된 술의 맛이 같을 리 없다. 하지만 위스키 전문가들은 오히려 단기간 숙성된 맛을 신선하게 여겼다. 카발란은 2010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열린 위스키 블라인드 테이스팅 이벤트에서 영국과 스코틀랜드 위스키를 압도적 점수 차로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2017년 국제주류품평회(IWSC)에서 월드와이드 위스키 트로피 등 굵직한 상도 수상했다. 영국 위스키 평론가 찰스 맥클린은 카발란에 대해 “열대과일잼 같은 독특한 아로마가 있다”고 평가했다.
‘와리’ 문화로 위스키 소비 확대
자국 풍광을 병과 포장지에 넣은 일본 산토리 위스키 히비키. [사진 출처 · 산토리 홈페이지]
일본은 100년 전부터 스코틀랜드 정통 위스키를 표방해왔다.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로 불리는 다케쓰루 마사타카(竹鶴 政孝)는 아예 스코틀랜드와 기후가 가장 비슷한 홋카이도에 증류소를 세웠다. 그러나 일본인은 서양인에 비해 알코올 해독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이에 1960년대에는 위스키가 건강을 해치는 술로 치부됐다. 이때 나온 것이 얼음을 넣어 마시는 ‘온 더 록(On the Rocks)’과 녹차나 우롱차, 또는 따뜻한 물을 섞어 마시는 ‘와리(割り)’ 문화다. 여기에 더해 탄산을 가미한 ‘하이볼’ 문화까지 등장하면서 위스키 도수를 12~13도에서부터 맥주와 비슷한 5도까지 조절해 마시는 것이 일반화됐다. 위스키가 더는 건강을 해치는 술로 여겨지지 않게 된 것이다.
최근 일본은 위스키를 넘어 다양한 증류주를 개발하고 있다. 진과 보드카가 그 예다. 이 두 술은 긴 숙성 기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제조하자마자 판매가 가능하다. 사케 양조장들도 자국 쌀을 사용해 진과 보드카를 만든다. 이러한 노력으로 최근 일본의 진은 맥주와 위스키에 이어 3위 수출 주류로 발돋움했다. 자국 농산물을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변신시키고 있다는 의미다.
국내 위스키시장은 축소 중 … 국산 브랜디에 관심을
국산 브랜디 제품인 고운달, 문경바람, 추사40(왼쪽부터). [사진 제공 · 오미나라, 사진 제공 · 오미나라, 사진 제공 · 예산사과와이너리]
한국도 한때는 위스키 산업에 도전했다. 1980년대 초반 진로와 오비, 백화양조가 국산 위스키 제조를 수년간 시도했다. 그러나 해외에서 수입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저렴하다는 판단 하에 1990년대 초부터 국산 위스키 제조를 포기했다. 국내에서 위스키를 숙성시키면 증발량이 너무 많아 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는데, 최근 인도와 대만, 일본 사례를 보면 아쉬운 대목이다.
이제 시대가 달라졌다. 주류에서도 독창적인 제품을 찾는 소비가 늘고 있다. ‘리얼 코리안 위스키’의 기회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대만은 킹카그룹이라는 굴지의 대기업이 카발란 사업을 벌이고 있고, 인도는 지역 또는 해외자본 투자로 위스키를 생산한다. 그와 달리 최근 한국 증류주는 주로 소규모 양조장에서 생산된다. 경북 문경 ‘오미나라’는 문경에서 생산된 오미자와 사과로 증류주 브랜디를, 충남 예산 ‘예산 사과 와이너리’는 직접 재배한 부사로 사과 브랜디를, 거봉으로 유명한 충남 천안의 ‘두레앙’은 거봉 브랜디를 제조하고 있다(곡류를 증류한 술은 위스키, 과일을 증류한 술은 브랜디로 불린다). 아직 규모는 작지만 그래도 우리 농산물을 사용해 고부가가치 술 생산에 도전하는 곳이 여럿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