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상형 전자담배 유해 오명은 마약 사용자 때문
궐련형보다 덜 나쁘다는 연구 결과도 나와
차등 과세 논란 그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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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10월 26일 액상형 전자담배 판매 중단 권고를 내리면서 관련 시장이 빠르게 얼어붙고 있다. 중단 권고의 이유는 미국에 있었다. 미국에서 액상형 전자담배로 중증 폐 손상을 겪은 환자가 1479명에 이르고, 33명은 목숨을 잃었다. 보건복지부 발표에 따르면 국내에도 액상형 전자담배 때문에 폐 손상을 입은 것으로 추정되는 환자가 발생했다.
일견 합당한 규제로 보이지만, 미국 전자담배 액상은 국내에서 유통되는 것과 다르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따르면 미국에서 발생한 전자담배 관련 폐 손상 환자의 약 80%는 THC 성분이 들어간 액상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THC는 대마초에 들어 있는 일종의 마약 성분이다. 하지만 국내에는 해당 액상 수입 및 유통이 금지돼 있다. 이에 업계는 “전자담배가 아니라 마약이 문제인데 정부가 엉뚱한 곳에 규제를 들이댄다”며 반발하고 있다.
일단 판매 중단 권고가 내려졌으니 대형유통점은 빠르게 움직였다. GS25, 미니스톱 등 편의점은 물론 신라, 롯데, 신세계 면세점도 액상형 전자담배를 더는 판매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마트, 일렉트로마트, 삐에로쑈핑 같은 대형마트도 액상형 전자담배의 신규 발주 중단 방침을 밝혔다. 대형 담배기업도 손해가 크지만, 전자담배 액상과 기기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소형업체는 말 그대로 고사 위기에 처했다. 많지도 않은 손님이 떨어져나간 것은 물론이고, 나쁜 소문에 신규 고객마저 거의 사라졌기 때문.
덜 나쁘다고 했는데, 왜 이제 와 판매 중단 권고
다양한 형태의 전자담배. 구형 액상형 전자담배(맨 왼쪽과 맨 오른쪽)와 CSV 액상형 전자담배 ‘쥴’(왼쪽에서 두 번째), 궐련형 전자담배 ‘아이코스’. [동아DB]
국내 전자담배시장이 본격적으로 커진 것은 2014년부터다. 당시 정부의 담뱃값 인상으로 전자담배에 가격 경쟁력이 생긴 것. 게다가 연초에 비해 냄새가 역하지 않고, 금방 사라지는 것도 장점으로 작용했다. 전자담배 소매점을 5년간 운영하고 있는 김모(43) 씨는 “2014년에는 들고 다니기 편한 일체형 전자담배가 인기였고, 액상도 담배 맛보다 과일향이나 박하향이 더 많이 판매됐다”고 떠올렸다.
보건복지부 집계에 따르면 액상형 전자담배 사용률은 2013년 2%에서 올해 5.1%로 2배 이상 증가했다. 수입량도 늘어나, 관세청 통계에 따르면 전자담배 수입량이 2013년 31t에서 지난해 138t으로 급증했다.
하지만 흡연자 감소에 따라 전자담배 업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10월 28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19년도 3분기 담배시장 동향’에 따르면 보건복지부에서 판매 중단 권고가 내려진 CSV(폐쇄형) 액상형 전자담배는 올해 7~9월 약 9800만 포드(pod)가 팔렸다. 5월 국내 첫 출시된 CSV 액상형 전자담배는 첫 달 2500만 포드가 팔렸고, 6월 3500만 포드를 거쳐 7월 4300만 포드로 정점을 찍었다. 8월과 9월에는 각각 2700만, 2800만 포드로 줄었다. 정부의 권고로 감소세는 더 가팔라질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판매 중단 권고를 내린 것은 CSV 액상형 전자담배다. 액상형 전자담배의 핵심 부품은 크게 두 가지로 카토마이저와 배터리다. 카토마이저는 액상을 저장하고 이를 기화하는 기능을 한다. 배터리는 기화에 필요한 전기를 공급한다. 일반 전자담배는 카토마이저에 액상을 직접 넣을 수 있다. 하지만 ‘쥴’로 대표되는 CSV 액상형 전자담배는 카토마이저를 카트리지 형식으로 구입해 사용하고 이를 통째로 교체하는 방식이다.
대충 규제로 상인만 손해
액상형 전자담배에 들어가는 다양한 액상(왼쪽)과 경찰이 압수한 대마 함유 전자담배 카트리지 액상. [동아DB]
편의점이나 대형마트와 달리 전자담배 소매점의 주력 제품은 CSV 액상형 전자담배가 아니다. 액상을 카토마이저에 직접 주입해 사용하는 전자담배를 주로 판매한다. 해당 제품은 판매 중단 권고 대상이 아니므로 문제가 없을 듯싶지만, 액상형 전자담배에 대한 소비자 인식이 나빠졌다. 이씨는 “당장 손님이 절반으로 줄었다. 판매 중단 권고를 내리면서 마약류 이야기는 쏙 빼놓았으니, 일반 담배보다 위험한 것 아니냐는 인식이 생겼다”며 한숨을 쉬었다. 가게를 자주 찾던 손님까지 “이렇게 위험한 제품을 팔면 어떻게 하느냐”며 환불을 요청했다고 한다.
전자담배 도입 초기에는 무니코틴 액상에 니코틴 농축액을 섞어 쓰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니코틴 함량이 아닌, 액상 용량에 따라 세금이 매겨졌기 때문. 하지만 니코틴 농축액의 위험성과 세금 회피 가능성을 방지하고자 판매를 제한하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일체형 액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2016년부터는 식품의약품안전처의 비임상시험관리기준(GLP)을 통과한 제품만 시중에 유통할 수 있다. 니코틴 액상은 온라인 판매가 금지돼 있어 매장에서 직접 구매해야 한다.
편의점도 상황이 좋지 않다. 당장 본사에서 판매 금지 방침이 내려왔으니, 악성 재고를 떠안게 됐다. 계상혁 전국편의점가맹점협회장은 “재고 부담은 가맹점이 지는데 실제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알리지 않고 불안감만 던져놓은 셈이다. 강력한 권고를 대대적으로 내리면 다른 전자담배 제품도 판매가 줄어든다. 무책임한 발표에 편의점업계도 성급히 따라가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관악구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임모(43·여) 씨는 “전자담배 액상을 찾는 손님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마저도 거의 사라졌다. 담배를 사러 편의점에 왔다 간단한 간식거리까지 사가는 손님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런 손님이 사라져 점주로서 타격이 크다”고 말했다.
전자담배 공포심만 심어주고
소비자도 이번 권고가 난해하기는 마찬가지다. 회사마다 판매가 제한되는 제품이 다르기 때문. 7월부터 쥴을 사용하고 있는 GS 편의점 앞에서 만난 박모(27) 씨는 “과일향이 나는 제품은 구매할 수 없고, 박하향이나 담배 맛에 가까운 액상형 전자담배는 살 수 있다. 같은 회사 제품인데 무슨 차이로 판매를 중단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업계에서는 정부의 권고 근거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미국에서 문제가 된 성분은 THC와 비타민E 아세테이트인데 국내에 유통되는 제품에는 해당 성분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일부 전자담배 소비자와 판매자는 청와대 국민 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 글을 올려 1만8000명의 동의를 얻기도 했다. 청원자는 ‘현재 문제가 되는 것은 전자담배가 아니라 불법 대마초 액상이다. (정부는) 국민에게 전자담배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별도로 전자담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계속 나오고 있다. 지난해 이철민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팀의 연구에 따르면 전자담배에서 포름알데히드, 나이트로소아민 등 발암물질이 검출됐다. 하지만 실험 결과의 상사 내용을 살펴보면 발암물질 양이 자연 상태의 양파에서 검출된 양보다 적었다.
전자담배가 일반 담배보다 덜 해롭다는 국가기관의 연구 결과도 있다. 2015년 8월 영국 보건국은 전자담배가 연초에 비해 95% 이상 덜 해롭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이 보고서는 ‘전자담배가 금연을 위한 보조수단으로 활용돼야 한다’면서 ‘처방전을 받은 사람에게 의료보험 재정을 이용해 전자담배를 지급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담배 종류마다 세율이 다른 이유는 담배 규제 및 관리의 근거인 ‘담배사업법’ 때문이다. 현행 담배사업법은 ‘연초의 잎을 원료의 전부 또는 일부로 하여 피우거나, 빨거나, 증기로 흡입하거나, 씹거나, 냄새 맡기에 적합한 상태로 제조한 것’을 담배로 규정한다. 반면 전자담배는 대개 연초 잎이 아닌 줄기나 뿌리에서 추출한 니코틴을 사용한다. 이 같은 이유로 전자담배는 법적으로는 담배가 아닌 ‘공산품’으로 취급된다. 담배의 정의를 확대하는 담배사업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된 상태지만 3년째 계류 중이다.
2014년 7조 원 규모이던 담배 세수는 담뱃값이 대폭 인상된 2015년 10조5000억 원, 그 이듬해 12조4000억 원으로 늘었다. 흡연율은 주춤했지만 세율 자체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해 세수가 11조8000억 원으로 줄었는데, 세율이 낮은 전자담배의 점유율이 높아진 것이 원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자유한국당 김순례 의원은 자체 조사를 통해 “액상형 전자담배 점유율이 10% 선까지 높아질 경우 주요 담배 과세 항목인 국민건강증진부담금 세수가 2000억 원가량 줄어들 것”이라고 추산한 바 있다. 실제로 시군 지방세 수입의 약 15%를 차지하는 담배소비세가 줄어 지난해 일부 지방자치단체가 증세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차등 과세 논란
정부의 전자담배 판매 중단 권고는 일각의 지적처럼 세수 확보를 위한 ‘꼼수’일까.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전자담배와 일반담배의 과세 형평성을 맞춰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구체적인 방향성을 두고는 이견을 드러냈다. 세수 증대 효과는 있겠지만, 해야 할 일이라는 지적이다. 안창남 강남대 세무학과 교수는 “담배 형태에 따라 세율을 달리하는 것은 구체적인 과세 대상이 다르다는 점에서 세법상 상식적”이라면서도 “애초 담배에 대한 과세 취지를 고려할 때 증세는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안 교수는 “담배에 무거운 세금을 매기는 것은 흡연율을 낮춰 국민건강을 보호하기 위해서인 만큼 전자담배와 일반담배 공히 1만 원 선까지 가격 인상을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대한금연학회 회장을 역임한 지선하 연세대 보건대학원 교수도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지 교수는 “정부의 액상형 전자담배 위험성 경고로 자칫 일반담배 흡연율이 높아질 가능성이 있으나 담뱃값 인상이 흡연율을 낮추는 가장 효과적 수단임은 분명하다”며 “일반담배와 전자담배의 세율 및 가격에 차등을 둘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2005년 발효돼 이듬해 한국도 가입한 세계보건기구(WHO)의 ‘담배규제기본협약(FCTC)’은 담배 수요를 낮추기 위한 가격 및 조세 조치의 필요성을 규정하고 있다.
업계도 전자담배가 법의 테두리에 들어와야 한다는 부분에는 동의했다. 김도환 한국전자담배협회장은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액상형 전자담배시장을 관리하겠다는 정부의 결정은 존중한다. 하지만 액상형 전자담배의 종류가 많은 만큼 과세체계도 다양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