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트럼프 ‘리얼리티 쇼’ 에 가려진 안보 우려

본말전도의 장면, “실무협상 이어가려고 정상회담 했나”

  •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입력2019-07-05 17: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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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3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측으로 갔다 되돌아오고 있다. [박영대 동아일보 기자]

    6월 3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측으로 갔다 되돌아오고 있다. [박영대 동아일보 기자]

    6월 30일 판문점에서 열린 3차 북·미 정상회담은 말 그대로 전광석화처럼 이뤄졌다. G20 정상회담 참석차 일본 오사카를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9일 오전 트위터로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을 타진했고, 5시간 만에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화답하면서 하루 만에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됐다는 점에서다.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난 이후 교착상태에 빠졌던 북·미 간 비핵화 협상 동력이 판문점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회복됐다는 점은 성과로 꼽힌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판문점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53분간 만나고 한국을 떠난 뒤 ‘북한 비핵화’는 또다시 실무협상팀 몫으로 남게 됐다. 

    빅터 차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미 정상회동에 대해 “리얼리티 TV쇼였다”며 “대단하다. 우리는 실무 차원의 회담을 다시 이어가고자 정상회담을 했다”고 꼬집었다.

    의제 협상팀이 의전 협상?

    6월 30일 오후 판문점 남한 측 자유의집에서 3차 북·미 정상회담을 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오른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박영대 동아일보 기자]

    6월 30일 오후 판문점 남한 측 자유의집에서 3차 북·미 정상회담을 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오른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박영대 동아일보 기자]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난 가장 큰 이유는 북·미 간 비핵화의 개념 규정과 이행을 위한 합의가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노이에서 북한은 영변 핵시설 영구폐기를 대가로 미국 측에 대북제재 일부 해제를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이 ‘영변 +α’를 요구하면서 ‘노딜’로 끝이 났다. 

    그런데 이번 판문점 북·미 정상회담 역시 비핵화 협상에 실질적인 진전이 있었다기보다 실무협상을 재개하기로 한 수준에 머물렀다. 비핵화라는 난제를 실무협상팀에게 다시 떠넘긴 의전용 만남이었다는 비판론이 대두되는 이유다. 



    북·미 정상, 여기에 문재인 대통령까지 포함한 남북미 정상이 한반도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에서 만났음에도 기대보다 우려가, 성과보다 아쉬움이 더 큰 것은 비핵화라는 알맹이보다 만남 자체에 너무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외교안보 분야 전문가들은 “하루 전 제안해 성사된, 급조된 정상회담이라 내용이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며 “트위터로 정상회담을 제안하는 것이 정상적인 과정일 수는 없다”고 말했다. 

    판문점 북·미 정상회담이 하루 만에 이뤄지면서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할 것인가’라는 의제보다 ‘어떻게 만날 것인가’ 등 의전 및 경호가 더 시급한 문제로 대두됐다고 한다.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앨리슨 후커 미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한반도담당 선임보좌관 등은 6월 29일 청와대 만찬에 참석하는 대신, 저녁 8시 30분부터 판문점에서 북한 최선희 제1부상, 김창선 국무위원회 부장 등과 함께 다음 날 있을 북·미 정상회담을 위한 실무협상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촉박한 일정 탓에 북·미 실무자들은 4·27과 5·26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 당시 매뉴얼을 참고해 의전과 경호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남북정상회담 때 한국 경호원이 있던 자리에 미국 경호원이 서 있게 하는 식의 북·미 간 경호 및 의전 합의가 이뤄졌다는 것. 한 외교 소식통은 “정상회담 전 의제를 협의할 고위급 접촉이나 실무협상 없이 곧바로 정상회담이 이뤄졌기 때문에 하루 전날 이뤄진 실무협상에서는 회담 내용보다 회담장 좌석 배치 등 의전에 치중한 협상이 이뤄졌을 개연성이 높다”며 “북한보다 미국 측 의전과 경호 준비가 덜 됐을 공산이 크다”고 분석했다. 북한은 지난해 판문점에서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을 치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회담을 준비할 수 있었지만, 경험이 부족한 미국 측은 전적으로 우리가 제공한 매뉴얼을 참고할 수밖에 없었다는 관측도 나왔다. 

    특히 북·미 정상회담을 실무적으로 준비한 비건 특별대표나 후커 선임보좌관 등 미국 측 인사는 비핵화 등에 대한 의제 협상을 하는 전문가이지, 동선과 경호 등 실무 의전을 다루는 전문가가 아니다. 

    실제로 판문점에서 남북미 3자 정상회동 때 경호와 의전은 물론, 취재 동선까지 한꺼번에 무너졌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가식 없는 리얼리티 쇼의 묘미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생사가 걸린 북한 핵문제를 쇼 하듯 성급하게 해치우는 것이 옳으냐는 의구심을 자아냈다. 

    트럼프 대통령 각본, 감독, 주연의 판문점 리얼리티 쇼는 한여름 밤의 꿈처럼 1시간여 만에 끝이 났다. 남은 것은 2~3주 내 실무협상이 재개돼 비핵화 협상이 본궤도에 오를지 여부다.

    실질적 비핵화 위한 새로운 셈법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판문점 북·미 정상회담과 남북미 정상회동은 비핵화 협상의 동력을 제공하는 의미 있는 계기”라며 “과제가 다시 실무협상으로 돌려진 만큼 비핵화를 위한 새로운 셈법을 모색할 때”라고 말했다. 그는 “포괄적 합의와 단계적 이행 방식의 새로운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포괄적 합의는 북·미 간 비핵화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한 뒤 큰 틀에서 비핵화를 위한 시간표와 로드맵을 도출하자는 것이고, 단계적 이행은 북한 비핵화 프로세스의 속성을 감안해 비핵화 절차를 몇 단계로 나누자는 것이다. 조 선임연구위원은 “북·미 싱가포르 공동성명 1항은 북·미 관계 정상화를 규정하고 있다”며 “북·미 양국 간 연락사무소 설치와 인도적 지원 등 관계 정상화를 통해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 진정한 비핵화로 향하는 첫 단계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군사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리얼리티 쇼 이후 핵안보를 보장할 레버리지가 실종될 우려마저 나왔기 때문에 북한 목선 입항 사건으로 무너진 한국군의 경계망 구멍이 더 크게 느껴진다”고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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