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의 ‘룰루레몬’ 플래그십 스토어 내부(오른쪽)와 레깅스를 출근 복장으로 연출한 ‘안다르’ 제품. [사진 제공 · 안다르, 뉴시스]
여성 인류학자의 미국 뉴욕 부촌 어퍼이스트사이드 관찰기를 다룬 책 ‘파크애비뉴의 영장류’는 ‘요가복의 샤넬’로 불리는 스포츠웨어 브랜드 룰루레몬(lululemon)이 2000년대 중반 뉴욕 상류층 여성들의 공식 운동용 의상이자, 어린이집 등·하원 및 놀이 약속 유니폼이라고 증언한다. 이후 ‘룰루레몬 패션’은 미국 전 지역, 전 계층의 여성으로 확대돼 급기야 2017년 미국의 레깅스 수입량은 청바지 수입량을 앞서게 된다.
지난해 10월 미국 블룸버그는 ‘어떻게 미국은 요가 바지의 나라가 됐나(How America Became a Nation of Yoga Pants)’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룰루레몬이 심지어 요가 스튜디오에 가본 적 없는 사람들의 옷장 또한 정복했다. 이제 사람들은 레깅스를 입고 출근도 한다’며 ‘요가 바지가 리바이스를 위협하면서 청바지를 실존적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 케이블TV방송 tvN 예능프로그램 ‘현지에서 먹힐까? 미국편’만 봐도 레깅스 차림으로 점심을 먹으러 나온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의 여성 직장인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시장조사 전문기관 엔피디그룹(NPD Group)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내 총 의류시장에서 스포츠웨어의 비중이 24%에 달했고, 올해는 그 비중이 더 증가할 전망이라고 한다.
운동 아닌 멋 내기 위한 패션 아이템
요가나 필라테스를 할 때 주로 입는, 몸에 딱 달라붙는 레깅스 같은 스포츠웨어를 일상생활에서도 입는 것을 ‘애슬래틱’(Atheletic·운동)과 ‘레저’(Leisure·여가)를 결합해 ‘애슬레저 룩(Athleisure Look)’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트렌드가 미국을 넘어 한국으로도 확산되는 추세다. 2017년 ‘한국의류산업학회지’에 실린 한 논문에 따르면 20대 여성의 76.9%가 애슬레저 웨어를 구매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을 정도다.온라인쇼핑몰 G마켓에 따르면 지난해 7월 전년 동기 대비 3배 가까이 증가한 레깅스 판매량이 최근(5월 23일~6월 23일)에도 전년 동기 대비 10% 늘었다. 아디다스의 여성용 ‘에센셜 3S 타이츠’는 최근 G마켓에서 완판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신세계백화점이 분석해본 결과(전년 동기 대비), 애슬레저 제품의 매출은 2017년 18.9%, 2018년 22.6%로 두 자릿수 신장을 거듭했다. 6월 1일부터 2주간 매출 신장률도 33.9%로 나타났다. 바캉스 시즌이 다가오면서 각 백화점의 스포츠 매장은 레깅스를 메인 제품으로 내세우고도 있다. 레깅스가 편하면서도 부피가 작고, 해변에서 입기에도 좋아 수요 증대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에 신세계백화점은 이달 말부터 여름 비치웨어 행사장에서 레깅스 등 피트니스 운동복을 수영복과 함께 선보이기로 했다.
6월 16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에서 열린 제5회 세계 요가의 날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이 대부분 레깅스를 요가복으로 착용했다. [뉴스1]
애슬레저 브랜드를 표방하는 국내 브랜드 ‘안다르’ 관계자는 “레깅스는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일명 ‘꾸안꾸’ 룩을 연출할 수 있어 2030 여성들 사이에서 큰 인기”라며 “품이 넉넉한 상의와 함께 입으면 더욱 편안하게 활동할 수 있어 많은 이가 여행 의상으로 선호한다”고 전했다. G마켓 관계자는 “요즘에는 과거와 달리 채도가 높고 화사한 느낌이 드는 컬러나 로고, 브랜드 심볼이 눈에 띌 정도로 과감하게 디자인된 레깅스가 주목받는 추세”라며 “애슬레저 룩이 운동이 아닌 멋을 내기 위한 패션 아이템으로 인식되면서 나타난 변화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체형을 그대로 드러내는 의상을 헬스클럽이나 요가 스튜디오 밖에서 입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한 논란 또한 일고 있다. 5월 모 대학 커뮤니티에는 ‘딱 붙는 레깅스 학교에서 입는 거 좀 그래?’라는 글이 게재돼 찬반 논쟁이 일었다. 개인의 자유라는 의견과 보기 민망하다는 의견으로 갈렸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짧은 상의에 Y존(사타구니 부위)이 드러나는 딱 달라붙는 레깅스를 입는 게 제정신인가’ ‘소위 애슬레저 룩을 한 사람을 멀리서 봤는데, 바지를 벗고 있는가 싶어 놀란 적 있다’ 등의 글이 올라온다. 반면 ‘한두 번은 놀라지만, 그다음엔 신경 쓰이지 않는다’ ‘건강해 보여 좋다’는 의견도 제시된다. 종종 레깅스 차림으로 외출하는 조모(34) 씨는 “미국에서는 레깅스 차림으로 자유롭게 지냈지만, 한국에서는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엉덩이와 복부를 가리는 긴 티셔츠를 반드시 입는다”고 말했다.
2만 원부터 20만 원까지 다양
인터넷에서는 레깅스로 애슬레저 룩을 선보이는 여성들의 사진을 많이 볼 수 있다. 영국 인플루언서 케이티 스투리노, 미국 플러스 사이즈 모델 로셀 존슨과 알렉사 펠리스(왼쪽부터). [블로그 The12ishStyle, 블로그 beauticurve, 인스타그램 @Alexa Phelece]
하지만 애슬레저 룩이 롱패딩처럼 반짝 인기로 끝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보수적이고 여성도 늘씬하지 않은 이상 몸매를 과감하게 드러내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즉 온몸에 찰싹 달라붙는 패션이 일부 세대와 계층에만 한정될 뿐, ‘룰루레몬족’이 뉴욕 파크애비뉴에서처럼 서울 거리에서도 득세하지는 못할 것이란 지적이다. 정재우 동덕여대 패션디자인학과 교수는 “레깅스는 제작이 쉬운 저부가가치 제품이고, 대중이 평상복처럼 꾸준히 구입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최근 증가하는 국내 애슬레저 브랜드가 롱런할 수 있을지는 좀 더 두고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