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 · 서울시립미술관]
영국 출신 동성애자 작가
서울시립미술관
그러나 의문은 여전하다. 이들은 상당한 지식과 경험이 요구되는 호크니의 작품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며 자기화하고 있을까. 물론 자신의 생각과 느낌대로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매우 좋은 감상법이다. 하지만 ‘미술 소비자’를 좀 더 양질의 문화소비층으로 육성하고, 미술 감상이 사회통합의 기틀로 작동하게 하려면 깊이 있는 배려의 장치가 필요하다. 폭이 늘면 그다음에는 질을 높여야 한다.
호크니 그림은 결코 친절하지 않다. 작품이 대부분 구상화(具象畵)라 ‘보이는 대로 보면 될 것’ 같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전혀 대중적이지 않다. 영국 태생인 그는 대학(영국 왕립예술학교) 시절부터 구상적 회화에 대한 분명한 입장과 논리적 이유를 정립하고 작업해왔다. 그는 화가이자 판화가, 무대미술가이며, 사진가인 동시에 팩스, 종이펄프, 컴퓨터, 아이패드로 작업하는 미술계의 얼리어답터다. 그의 그림은 일견 대중적으로 보이는 당의정(糖衣錠) 때문에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만, 실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매우 깊은 철학적 고민과 그림의 본질에 대한 성찰의 결과물이다.
학창 시절부터 호크니의 작업에는 표현주의적 요소가 강했다. 특히 동성애자인 자신의 성(性) 정체성을 바탕으로 내밀한 경험과 상상을 상징적 어법으로 표현해 독창성이 뛰어난 청년 작가로 인정받았다. 1964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동성애자에게 관대한 미국 로스앤젤리스(LA)로 이주한다. LA에서 그는 유화 대신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생기 넘치는 원색의 작품들을 제작했다. 특히 수영장 물이 튕겨 올라오는 순간을 포착한 그림 ‘더 큰 첨벙’(A Bigger Splash·1967) 등을 통해 보는 이들의 눈과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며 명성을 더해갔다. 이후 LA와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를 오가며 호크니는 자연이 그림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했다. 특히 빛이 만들어낸 사람들의 관계 속 사랑과 긴장을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원근법을 버려라”
데이비드 호크니, ‘블루 테라스 정원’, 캔버스에 아크릴, 2015 [ⓒ David Hockney, Photo Credit: Richard Schmidt]
데이비드 호크니, 1982년 3월 8일 ‘로스앤젤레스의 블루 테라스’, 폴라로이드 17개로 구성. [ⓒ David Hockney, Photo Credit: Richard Schmidt]
그는 ‘명화의 비밀’(The Secret Knowledge· 2001) 등 많은 저서와 대담집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설명했다. 특히 ‘눈속임 그림’의 속성을 드러내고자 광학 장치인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와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를 활용해 실험했고, 이를 통해 미술사에서 비중 있는 작가의 작품들이 거울과 렌즈의 광학적 이용을 통해 구현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광학적 도구는 사물 형태를 정확히 잡아주는 장치일 뿐, 그림을 그리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실험은 계속돼 1980년대 초, 자기 작업의 전환점이 되는 포토콜라주를 개시했다. 그는 사진을 촬영할 때 광각렌즈를 사용하면 화면이 ‘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펴기’ 위해 폴라로이드 사진과 35mm 펜탁스 카메라를 통해 얻은 상(象)을 이어 붙여 화면의 깊이, 즉 소실점 없는 풍경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소실점 없는, 다시 말해 원근법의 적용을 받지 않으면서도 아름답고 직접적으로 자연 그대로를 소요할 수 있는, 다(多)시점의 입체파적 풍경화가 그의 목표가 됐다.
데이비드 호크니,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2007, 50개의 캔버스에 유채. [ⓒDavid Hockney, Collection Tate, U.K. ⓒTate, London 2019]
데이비드 호크니, ‘클라크 부부와 퍼시’, 1970~71, 캔버스에 아크릴. [ⓒDavid Hockney, Collection Tate, U.K. ⓒTate, London 2019]
데이비드 호크니, ‘더 큰 첨벙’, 1967, 캔버스에 아크릴. [ⓒDavid Hockney, Collection Tate, U.K. ⓒTate, London 2019]
데이비드 호크니, ‘호텔 우물의 경관 Ⅲ’, 1984~85, 석판화 어디션 80. [ⓒDavid Hockney/Tyler Graphics Ltd., Photo Credit : Richard Schmidt]
또한 호크니는 시점의 다양화를 통해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차이를 규명하고자 2010년부터 3~18대의 카메라를 설치해 한곳을 촬영하는 멀티 카메라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진 작업에서도 매번 새로운 실험에 나섰다. 2014년 무렵 다시점의 디지털 사진을 선보였고, 2017년에는 애지소프트 포토스캔(Agisoft PhotoScan) 프로그램으로 수천 장의 이미지를 재배치해 대형 사진벽화를 만들었다. 이후 이미지들을 작은 캔버스로 옮기고 연결시켜 소실점이 사라진 대형 그림을 제작했으며, 이 그림은 그 자체로 하나의 현실 또는 자연이 되도록 했다.
외부기획사에 맡긴 전시, 아쉬워
8월 4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데이비드 호크니展. [사진 제공 · 서울시립미술관]
사실 이번 호크니 전시를 보는 내내 작품은 좋았지만 전시는 아쉬웠다. 7개 소주제로 나눈 전시 구성은 방대한 느낌을 주지만, 특정 소주제의 경우 그 내용이 너무 빈약했다. 특히 호크니의 원근법 없는 풍경화 작업의 대표작인 포토콜라주가 빠져 무척 아쉬웠다. 흥행을 위한 고육책이긴 하겠지만, 그의 작품 ‘예술가의 초상’(1972)이 지난해 경매에서 9030만 달러, 우리 돈으로 1000억 원 넘는 최고가로 낙찰됐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마케팅은 자제했어야 했다. 또 주최는 서울시립미술관인데 실제 운영을 맡아하는 주관을 외부기획사에 맡긴 점도 이해하기 어렵다. 이는 서울시립미술관이 전시를 감당할 만한 인적, 예산상 능력이 없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보다 시립미술관부터 제대로 운영할 필요가 있다. 시민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미술관을 찾으면서 기획사의 손익 때문에 고액의 관람료를 내야 하는 현실이 모처럼 불어온 새로운 바람을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물 들어왔는데 노 저을 사람이 놀고 있다면, 이는 직무유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