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와 남녀 동수의 초대 내각 각료들. [캐나다 총리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2015년 11월 총리에 취임한 이후 첫 내각을 구성하면서 남성 15명, 여성 15명의 장관을 발표해 캐나다는 물론 국제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당시 남녀 동수 내각은 캐나다 역사상 처음이었다. 당시 트뤼도 총리는 기자들이 남녀 동수 내각을 구성한 이유를 묻자 “지금은 2015년이기 때문”이라고 ‘쿨’하게 답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발언은 각국 정치권에서 회자되며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트뤼도 총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자칭하면서 성(性)평등 정책을 적극 추진해왔다. 게다가 40대에 188cm 훤칠한 키, 잘생긴 외모의 ‘훈남’인 트뤼도 총리는 쾌활한 성품과 친화력까지 갖춰 캐나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비리 사건 무마 위해 압력 행사 의혹
쥐스탱 트뤼도 총리와 조디 윌슨 레이볼드 전 법무장관(왼쪽). 윌슨 레이볼드 전 법무장관이 하원 법사위원회에서 증언하고 있다. [Canadian Press, CP]
잘나가던 트뤼도 총리가 대형건설사의 비리 사건 수사를 무마하려고 법무장관에게 압력을 가했다는 캐나다 유력 일간지 ‘글로브 앤드 메일’의 보도(2월 12일자)로 지지율이 급전직하하고 있다. 글로브 앤드 메일에 따르면 트뤼도 총리는 지난해 가을 조디 윌슨레이볼드 당시 법무장관에게 뇌물 제공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SNC-라발린을 기소하지 말라는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이 업체는 트뤼도 총리의 정치적 고향인 퀘벡주 몬트리올에 본사를 둔 캐나다 최대 종합건설사로, 2001~2011년 리비아에서 공사를 따내려고 무아마르 카다피 당시 국가원수의 일가에게 4800만 캐나다달러(약 407억 원)를 준 혐의로 2015년부터 지금까지 수사를 받고 있다. 윌슨레이볼드 장관은 이 보도가 나오자 “국민은 내가 진실을 말하기를 바란다”며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캐나다 하원 법사위원회는 트뤼도 총리의 ‘사법 방해 스캔들’을 조사하고자 관련 인사들을 대거 소환해 청문회를 열었다. 윌슨레이볼드 전 장관은 2월 27일 청문회 증언에서 “트뤼도 총리와 측근들로부터 SNC-라발린을 기소 유예하라는 은근한 협박을 받았다”며 “법무장관으로 재임 중이던 지난해 9월부터 12월까지 10차례의 전화와 10번의 면담, 문자메시지 등을 통해 압박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또한 그는 “트뤼도 총리가 사건 처리에 따른 지역 일자리 손실과 회사 이전 등을 우려했다”며 “트뤼도 총리가 퀘벡주 출신 하원의원이라는 사실과 연말로 예정된 퀘벡주 선거를 언급했다”고 밝혔고, “트뤼도 총리의 요구를 거부한 대가로 1월 보훈장관으로 좌천됐다”고 주장했다.
윌슨레이볼드 전 장관은 트뤼도 총리가 초대 내각 때 발탁한 스타 여성 장관이다. 트뤼도 총리가 윌슨레이볼드를 첫 원주민 출신 법무장관에 기용한 것은 캐나다에서 과거 30년간 원주민 여성 1200여 명이 살해되거나 실종된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 공약을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캐나다에선 그동안 원주민 사회와 인권단체가 원주민 여성 실종 및 살해 사건에 대한 전국적인 특별 조사를 끈질기게 요구해왔으나 역대 정부는 이를 ‘원주민의 문제’가 아니라 ‘범죄의 문제’라며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캐나다에서 원주민 여성은 전체 여성 인구의 4%에 불과하지만 전체 범죄 피해 여성 중에서는 16%를 차지한다. 이들은 이누이트족과 혼혈 인디언 등으로, 일정한 주거 없이 유목생활을 하거나 빈곤에 시달려 범죄의 표적이 돼왔다. 윌슨레이볼드 전 장관은 그동안 원주민 여성 실종 및 살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려고 총력을 기울여왔다. 그런데 윌슨레이볼드 전 장관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트뤼도 총리가 원주민 출신을 장관에 임명한 것을 빌미로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제인 필포트 전 캐나다 재무장관. [제인 필포트 트위터]
스캔들이 불거지자 트뤼도 총리의 최측근이던 제인 필포트 재무장관도 3월 4일 “더는 트뤼도 총리의 편을 들어줄 수 없다”며 사퇴했다. 필포트 전 장관은 사직서를 통해 “사건과 관련해 법무장관에게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거나 기소권 행사를 방해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기본 원칙”이라며 “슬프게도 나는 정부가 이번 사안에 대처해온 방식을 신뢰할 수 없다”고 밝혔다. 초대 내각에서 보건장관을 맡았던 필포트 전 장관은 안락사법 제정 등 상당한 업적을 세우며 능력을 보여왔다.
이 두 여성 장관의 사임은 트뤼도 총리에게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주고 있다. 야권은 트뤼도 총리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제1야당인 보수당의 앤드루 시어 대표는 “트뤼도 총리가 통치를 지속할 수 있는 도덕성을 상실했다”며 “검찰은 트뤼도 총리의 사법 방해 혐의를 수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제2야당인 신민주당의 재그밋 싱 대표 역시 “트뤼도 총리가 사과하지도 않았으며, 국민과의 신뢰를 손상시켰다”고 강조했다. 반면 트뤼도 총리는 “내각 내에서 소통 부재와 신뢰 붕괴 사태가 발생한 것에 대해 후회한다”면서도 “법치주의를 짓밟지 않았고 부적절한 압력은 없었다”며 스캔들을 강력하게 부인했다.
스캔들을 돌파할 유일한 방법
이번 스캔들로 트뤼도 총리의 ‘클린 이미지’는 퇴색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트뤼도 총리는 페미니즘과 난민, 성 소수자, 원주민 문제 등 사회적 약자 문제 해결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여왔다. 이 때문에 그에겐 ‘서방 진보정치의 아이콘’이라는 수식어가 붙기까지 했다. 또 ‘낡은 부패 정치와 작별’을 강조해온 트뤼도 총리의 약속도 허언(虛言)임이 드러났다. 토론토 일간지 ‘토론토 선’은 “트뤼도 총리의 ‘페이크(fake) 페미니즘’이 드러났다”며 “트뤼도 총리의 ‘이미지 정치’가 한계를 보였다”고 지적했다. 국민 여론도 싸늘하다. 취임 이후 60%대를 유지하던 트뤼도 총리의 지지율은 30~40%대로 추락했다. 보수당 지지율 역시 집권 여당인 자유당보다 7%p나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10월 총선을 앞두고 있는 트뤼도 총리로선 최대 정치 위기에 직면한 셈이다.